잃어버린 계절의 끝에서
‘삐익’
경기 종료를 알리는 호루라기가 울렸다.
“끝났나봐”
과자를 먹던 찬영이 운동장을 보며 말했다.
0대0이었다.
경기가 원하는 대로 잘 풀리지 않았는지 재현이와 선우 모두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저기압의 기운들이 몰려온다”
재민이 먹던 과자봉지들을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경기가 잘 안풀리면 같이 공을 찬 선배들이 꼭 한마디씩 던지고 갔다.
“얼른 가자”
민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구석으로 모였다.
괜히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욕 섞인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재현이와 선우가 가방과 수건을 서둘러 챙겼다.
재현이는 선물 더미에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편지를 골라 넣느라 조금 늦었다.
“가자”
편지를 정리한 재현이가 손짓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선우가 먼저 인사했고, 재현이도 고개를 숙였다.
우리도 따라서 인사했다.
그때였다.
“잠깐만”
선배 한 명이 우리를 불렀다.
그리고 나를 향해 걸어왔다.
“너 이름이 뭐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이 막혔다.
“야야 꿈 깨. 민혁이 여친이래”
뒤에서 웃음이 터졌다.
“아.. 그래? 미안하다.”
그 사람은 멋쩍어하며 돌아갔다.
순간 공기가 애매하게 가라앉았다.
“가자”
재민이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야, 더 커플인 척 좀 해봐”
찬영이 장난스럽게 카메라를 들었다.
“뭐, 이렇게?”
민혁이가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표정 좀 풀어. 남친 보면서”
나는 민혁이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사귄다는 소문이 돌았다.
처음엔 부정했지만 그러다 굳이 바로잡지 않게 됐다.
민혁이는 고백이 줄어서 편하다 했고, 나는 괜히 말을 걸어오는 애들이 줄어 편했다. 우리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게 편했다.
“너네 꽤 유명한 커플인거 알아?”
찬영이 나와 민혁이를 찍으며 말했다.
“유명까지는..”
나는 웃으며 넘겼다.
“그니까 부정을 좀 해”
선우가 내 어깨에 올려진 민혁이 팔을 툭 내렸다.
“불편하면 말해. 바로 아니라고 할게”
민혁이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와서?”
나도 받아쳤다.
선우는 잠깐 나를 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넌 또 편지야?”
재민이가 재현이 손을 가리켰다.
“버릴 순 없잖아.”
재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읽긴 해?”
“가끔.”
짧은 대답.
그 순간, 재현이 시선이 잠깐 나를 스쳤다.
“귀찮게 그런 거 챙기면 뭐해.”
선우가 말했다.
선우랑 민혁이는 편지를 잘 챙기지 않았는데 재현이는 꼭 가져갔다.
읽지 않아도.
“그래도 진심일 텐데. 챙기는 게 보기 좋아.”
나는 괜히 그렇게 말했다.
재현이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가, 아무 일 없다는 듯 가방을 닫았다.
고깃집에 도착해 자리에 앉았다.
내가 옆에 앉으려 하자 재현이가 갑자기 말했다.
“나 땀 냄새 날 텐데.”
나는 얼굴을 조금 가까이 기울였다.
“뭐, 뭐해…?”
그가 당황했다.
“괜찮아. 안 나.”
사실은 땀 냄새보다 더 선명한, 시원한 향이 났다.
나는 괜히 눈을 오래 맞췄다.
재현이는 시선을 내렸다.
“응…”
그게 전부였다.
“늘 먹던 대로?”
찬영이가 메뉴판을 덮었다.
“고기!”
재민이 외쳤다.
그날도
다른 날과 다르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고,
축구를 보고,
밥을 먹고,
함께 집에 갔다.
늘 우리는 함께였다.
“어두워졌네.”
창민이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몇 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해는 이미 넘어가고 있었다.
“일단 들어갈 곳부터 찾자.”
재현이가 말했다.
“어떻게 한 명도 폰이 없냐.”
창민이가 주머니를 몇 번이나 뒤적였다.
“그러게. 이게 말이 돼?”
영훈이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
바닷가를 벗어나자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저게 뭐야…?”
내가 걸음을 멈췄다.
건너편, 가로등 아래에 서 있던 그것은 사람과 비슷한 형체였지만 분명 사람은 아니었다.
고개가 비정상적으로 기울어 있었고, 팔은 길게 늘어진 채 바닥을 스치고 있었다. 얼굴은 웃고 있는 것 같았는데, 눈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것이 천천히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관절이 어긋난 것처럼 덜컥이며.
“가자. 빨리!”
민혁의 목소리에 우리는 정신을 차렸다.
건물 사이로 뛰어들었고, 앞에서 달리던 선우가 갑자기 멈췄다.
“왜—”
재현이가 묻는 순간,
나도 보았다.
앞쪽 골목 끝에도 또 하나가 서 있었다.
아까보다 더 가까이,
더 선명하게.
이번엔 분명히 보였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도망쳐!”
선우가 소리쳤다.
우리는 왔던 길로 다시 뛰었다.
나는 속도를 맞추지 못하고 점점 뒤처졌다.
오른쪽 발목이 욱신거렸다.
그 순간, 재현이가 나를 안아 들었다.
“괜찮—”
말을 하려 했지만 숨이 가빴다.
나는 그의 어깨 너머로 우리를 쫓아오는 그것을 바라봤다.
“보지 마.”
재현이가 한 손으로 내 머리를 자신의 어깨 쪽으로 눕혔다.
나는 말없이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어두워질수록 그것들은 더 많이 보였다.
골목마다,
창문 너머로,
길 건너편에.
우리는 한 건물 안으로 몸을 숨겼다.
“더 돌아다니긴 힘들 것 같아.”
창문 밖을 살피던 선우가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버티자.”
재민이가 문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재현이가 나를 내려주었다.
“고마워… 괜찮아?”
나는 그의 뺨을 스친 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재현이는 잠깐 멈칫했다가 고개를 조금 더 기울였다.
“멀쩡해.”
웃었지만 숨은 거칠었다.
사무실 안에는 소파와 의자가 몇 개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발목을 내밀었다.
“아프면 말을 해.”
재현이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한 번만 더 괜찮은 척 해봐.”
“알겠어…”
내가 작게 대답하자 그는 바로 덧붙였다.
“화낸 거 아니야.”
“알아.”
나는 웃었다.
선우가 옆에 앉으며 내 머리를 헝클었다.
“넌 좀 혼나야 돼. 오냐오냐하니까.”
“발은?”
선우가 재현이에게 물었다.
“많이 부었어. 뼈는 아닌 것 같은데… 며칠은 못 걸을 거야.”
밖을 보던 재민이 말했다.
“저 이상한 것들, 더 많아졌어.”
“괴물 아닐까.”
민혁이 중얼거렸다.
“뭐든 간에, 마주치면 안 돼.”
재현이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지친 우리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누군가가 내 무릎 위에 무언가를 덮어주며 속삭였다.
“누워서 자.”
눈을 떠보니 재현이었다.
내 무릎 위엔 담요가 덮여 있었다.
“내가 바닥에서 잘게.”
“민혁이랑 둘이 누워 자려고?”
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는 순간 말이 막혔다.
재현이가 피식 웃으며 나를 다시 눕혔다.
“됐어. 얼른 자.”
“너 이제 버스 탈 수 있어?”
어둠 속에서 재현이가 물었다.
“응… 작년부턴 조금씩.”
그날 이후, 나는 버스를 타지 못했다.
가까우면 걸었고,
멀면 택시를 탔다.
버스를 피했다.
“지금은 어때?”
“어?”
“다른 애들 말고. 넌.”
나는 잠시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무섭지 않았다.
“사고보단… 덜 무서웠어.”
아마도, 그 순간 나를 감싸던 팔 때문이었을까.
“넌 왜 나부터 감싸.”
나는 낮게 말했다.
“그러다 네가 다치면 어떡해.”
재현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난 그날로 돌아가면 꼭 네 옆에 앉을 거라고, 수도 없이 생각했어.”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날, 찬영이 옆자리는 내 자리였다. 그리고 나는 오래 깨어나지 못했다.
“이번엔 내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야.”
재현이가 웃었다.
“조금은 바로잡은 기분이 들어.”
그의 표정은 이상하게도 홀가분해 보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다음부턴 그러지 마. 다치는 건… 나 하나면 충분해.”
기억이 스쳤다.
도로 위, 피, 손을 뻗던 순간.
닿지 못했던 손.
“그냥 고맙다고 해.”
재현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도 안 다치게 할게. 너도, 나도.”
근거는 없었지만 그의 말은 이상하게 믿음이 갔다.
“응… 고마워.”
그 말이 밤공기 속에 오래 남았다.
그리고 우리는 천천히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