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굴절

잃어버린 계절의 끝에서

by 프리지아


“일어났어?”

눈을 뜨니 민혁이었다.

선우와 민혁이 먼저 일어나 창가에 서 있었다.

아주 긴 꿈을 꾼 기분이었다.

기분이 좋아서, 차라리 깨지 않았으면 싶었던 꿈.

“저쪽에 화장실 있어. 뒤져보니까 쓸 만한 게 꽤 나오더라. 먼저 가서 씻어.”

선우가 고개로 방향을 가리켰다.

사무실이라 그런지 새 칫솔과 비누, 수건까지 있었다.

물도 나왔다.

이상할 만큼 정상적이었다.

씻고 나오니 모두 한결 가벼워 보였다.

차례로 화장실을 다녀왔다.

“아침 내내 봤는데 괴물은 안 보여.”

민혁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그럼 움직이자.”

재민이 의자를 정리하며 말했다.

“어디로?”

나는 소파에 앉은 채 물었다.

우리에겐 목적지도, 돌아갈 방법도 없었다.

재현이가 창밖을 바라본 채 말했다.

“여기가 어딘지부터 알아야지. 꿈이 아니라면… 돌아갈 방법도 있을 거고.”

그의 말은 차분했지만 확신은 없었다.

“나가보자.”

나는 작게 말했다.

우리는 사무실을 뒤져 필요한 것들을 챙겼다.

구급상자, 망치, 드라이버.

“이건 필요할까?”

내가 묻자 민혁이 웃었다.

“혹시 모르니까.”

시간을 알 수 없어 답답했는데 손목시계 하나와 작은 알람시계를 발견했다.

시침은 10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전인지, 오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출발하려는 순간, 선우가 다가왔다.

“업어줄게.”

“괜찮아. 천천히면 걸을 수 있어.”

“그럼 나눠서 가보자.”

재민이가 말했다.

“나, 재현이, 재민이는 주변부터 훑어보고.”

민혁이 정리했다.

“우리는 큰 건물 쪽으로 가볼게.”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1시에 여기서 보자.”

재현이가 알람시계를 내 손에 쥐어줬다.

“재현아, 이거.”

나는 그의 가디건을 내밀었다.

“입어. 아니면 그냥 가지고 있어.”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옷을 꼭 쥐었다.

“조심해.”

그 말이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


나와 선우는 몇 분 걷다 작은 마트를 발견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안에는 먹을 게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진열대도, 계산대도 정돈된 채였다.

마치 사람들만 사라진 것처럼.

우리는 카트에 물과 빵, 통조림을 담았다.

“이 정도면 굶어 죽진 않겠다.”

선우가 말했다.

“그러게… 다행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상했다.

이렇게 아무것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비어 있는 공간이.

“카트 탈래?”

선우가 내 발목을 힐끗 보며 물었다.

“너 세 개 다 끌 수 있어?”

“기차처럼 연결해서 끌지 뭐.”

그가 웃었다.

그 웃음 덕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사람이다.”

나는 선우 뒤쪽을 가리켰다.

분명 사람이었다.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먼저 다가갔다.

“저기요.”

그는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표정이 없었다.

아무 감정도,

질문도,

당황도 없었다.

그저… 빤히.

눈이 마주친 순간 어제 본 괴물과 닮았다는 생각이 스쳤다.

움직임은 사람이었지만 시선이 달랐다.

“저기…”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가자.”

뒤에서 선우가 내 손을 잡았다.

그는 그 사람을 한 번 바라보고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끌었다.

밖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이 더 있었다.

모두 무표정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말도 없이.

움직이지도 않고.

“여기 사람들… 이상해.”

선우가 낮게 말했다.

“사람이 아니야.”

나는 그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발목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시선들만 피하고 싶었다.

선우와 나는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다.

카트를 세워두고 우리는 친구들을 기다렸다.


시간이 조금 지났는데도 거리는 조용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고 있던 재현이의 가디건 소매를 꽉 쥐었다.

“너 그때 기억나?”

선우가 나를 빤히 보며 물었다.

“언제?”

“동아리실에 가방 두고 와서, 학교 불 다 꺼진 날. 우리 둘만 밖에 서 있었던 날.”

“…아.”

기억났다.

공부하다가 잠깐 나갔다가 늦게 돌아왔고, 학교는 이미 캄캄했다.

들어가기 무서워서 나와 선우는 밖에 남고, 재현이, 민혁이, 찬영이, 재민이가 안으로 들어갔다.

“너 그때도 애들 안 나온다고 계속 입구만 보고 있었잖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나는 계단 아래에서 서성였고, 선우는 벽에 기대 나를 보고 있었다.

한참을 지켜보더니 교복 자켓을 벗어 내게 건넸다.

“앉아.”

나는 그의 자켓으로 무릎을 덮고 계단에 앉았다.

그때도 지금처럼, 기다리는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애들 계단에서 자기들끼리 장난치느라 늦은 거였잖아.”

선우가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떠들썩한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뛰어나왔다.

별일 아니었다는 얼굴로.

“…그러니까 걱정 말고 앉아 있어.”

선우가 화단 가장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그의 옆에 앉았다.

이번에도 그 말이 맞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미안, 길을 좀 헤맸어.”

재민이가 먼저 뛰어왔다.

나는 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우리 울보 또 울었겠다.”

선우가 웃으며 말했다.

“누가 울보야.”

내가 째려보자 다들 웃었다.

재현이가 카트 손잡이를 잡았다.

“괜찮았어?”

“응. 마트가 있어서 이것저것 챙겼어.”

“가자. 괜찮은 데 찾았어.”

민혁이가 손짓했다.

도착한 아파트는 놀라울 만큼 깨끗했다.

문이 열린 집 하나.

생활의 흔적은 남아 있는데 사람은 없었다.

카트를 풀어놓자 진짜 집처럼 보였다.

“이러니까 우리 놀러 온 것 같은데?”

선우가 말했다.

“긍정적 사고 좋네.”

민혁이 웃었다.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오랜만이네.’

그날 이후로, 이렇게 다 같이 웃은 적이 있었나.

깨지지 않았으면 하는 장면이었다.



“…먹을래?”

옆에서 재현이가 말했다.

“어? 뭐?”

“밥 뭐 먹고 싶냐고.”

“아무거나. 네가 주는 대로 먹을게.”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밥을 먹기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건물 사이로 하나둘 나타나고 있었다.

느리게, 어둠을 따라.

“무슨 일 있어?”

재현이가 다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영원히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는 걸 말할 수는 없었다.

그건 너무 이기적인 바람 같았다.

“발목은?”

“괜찮아진 것 같아.”

발목을 조심스럽게 돌려봤다.

아프지 않았다.

이 세계는 상처도 빨리 잊게 만드는 걸까.

식사는 단순했다.

즉석밥과 참치, 김.

하지만 이상하게 따뜻했다.

재민이 설거지를 하고, 민혁은 선우와 도어락을 만졌다.

나는 재현이와 종이를 펼쳤다.

“아파트 주변은 대충 이렇게 생겼어.”

내가 그리자 재현이가 몇 군데를 짚었다.

“여기랑 여기 가보자.”

“해 지기 전까지만.”

창밖을 다시 봤다.

괴물들은 확실히 어둠을 따라 늘어나고 있었다.

우리는 규칙을 정했다.

둘씩 다닐 것.

해 지기 전 돌아올 것.

사람을 만나도 다가가지 않을 것.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자 재민이 말했다.

“이 세계에 사람은 우리뿐이야.”

단호했다.

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돌아갈 수 있을까.”

민혁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

“그러려고 돌아다니는 거잖아.”

재현이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날 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내일 나가보자.’

그 말만 남기고 각자 자리를 정했다.

거실 하나, 방 두 개. 여섯 명이 지내기에 충분했다.

나는 혼자 방을 썼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밤이었다.

보일러도, 바람도 느껴지지 않았다.

날씨가 멈춘 것처럼.

가디건을 접어 베개처럼 놓고 누웠다.

시간도 멈춘 걸까.

‘이런 생각 안 하기로 했는데.’

혼자 깊이 잠기는 버릇을 고치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었는데.


천장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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