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계절의 끝에서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리자 아이들이 교실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아~ 지루해.”
선우가 책상에 엎드렸다.
여름방학이 얼마 남지 않아 수업은 계속 자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제 동아리 시간이네.”
나는 공책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말했다.
그때 민혁이 선우 앞자리에 털썩 앉았다.
“김선우 또 자냐?”
재현이도 따라와 내 앞자리에 앉았다.
“또 자습이었어?”
내 공책을 보고 묻는다.
“응. 하루 종일 자습이래.”
“넌 자습 시간에도 공부해?”
선우가 고개만 돌려 나를 본다.
“그럼 뭐해?”
단호하게 말하자 민혁과 재현이 웃었다. 선우는 괜히 더 엎드렸다.
그때였다.
“야, 넌 엄마가 이런 것도 안 해주냐?”
뒷자리에서 웃음이 터졌다.
고개를 돌리자 몇 명이 한 아이를 둘러싸고 있었다.
교복 단추가 떨어진 셔츠를 붙잡고 놀리고 있었다.
“거지냐? 부모님 뭐하시냐?”
교실이 조용해졌다. 그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저것들…”
선우가 몸을 틀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데?”
내가 먼저 말했다.
순간 교실이 멈춘 것처럼 조용해졌다.
“뭐?”
“엄마 없는 게 그렇게 웃겨?”
공기가 바뀌었다.
남자애 하나가 비웃듯 말했다.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게 없다잖아.”
“그게 왜 당연한 건데?”
나는 공책을 꽉 쥐었다.
스프링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넌 뭔데 나서?”
한 명이 걸어왔다.
‘드르륵’
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짧았지만 낮은 목소리였다.
걸어오던 애가 멈췄다.
그때 재현이 내 손에서 공책을 빼앗았다.
“묻잖아. 그게 왜 당연하냐고.”
재현이도 일어섰다.
교실이 더 조용해졌다.
그러다 한 놈이 비웃듯 말했다.
“너야말로 엄마 없냐?”
선우가 앞으로 나가려 했다.
나는 선우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없는데.”
정적.
짧았는데 길게 느껴졌다.
선우도, 민혁도, 재현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까 웃던 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와. 너네도 몰랐나 보네? 속이고 살면 재밌냐?”
속였다.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있다고 한 적 없는데.”
말을 하려는 순간 재현이가 끊었다.
“그만해. 유치하잖아.”
목소리가 낮았다. 화가 났을 때 나오는 톤이었다.
민혁이 덧붙였다.
“재밌으면 너희끼리 해.”
“가자.”
선우가 내 손을 잡았다.
동아리실 문이 닫히자 공기가 달라졌다.
“무슨 일 있어?”
찬영이 물었다.
선우는 대충 둘러댔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속였다.’
그 말이 자꾸 걸렸다.
속이려고 한 건 아닌데.
그냥,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생각이 꼬였다.
짜증이 났다.
“나 엄마 없어.”
갑자기 말이 튀어나왔다.
다들 멈췄다.
“속이려고 말 안 한 거 아니야. 그냥… 말 안 했을 뿐이야.”
눈을 못 들었다.
조용했다.
“속인 거 아니야.”
재현이가 바로 말했다.
“말하고 싶을 때 말해.”
짧았는데 단단했다.
그 말에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재민과 찬영은 아직 당황한 얼굴이었다.
민혁이 상황을 설명했고 그제야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그때 선우가 말했다.
“야. 나 동생이랑 의절했어.”
“뭐 또 게임 졌냐?”
“이번엔 진지해. 동생 없어.”
다들 웃었다.
억지로 만든 웃음이었지만 고마웠다.
왠지 다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덧붙였다.
“나 혼자 살아.”
“그럼 오늘 너네 집 가자.”
찬영이 바로 말했다.
“치킨 시켜.”
“그래, 가자!”
그렇게 여름방학 동안 우리 집은 아지트가 됐다.
“야야 불 꺼!”
선우가 과자를 들고 소리쳤다.
집에 사람이 다섯 명이 넘게 있는 게 처음엔 어색했다.
부엌에서 물을 마시려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재현이었다.
“뭐가?”
“우리가 자주 오는 거.”
나는 거실을 봤다.
과자 가지고 싸우는 소리, 웃음소리.
“좋은데.”
조금 웃으며 말했다.
“집에서 사람 소리 나는 거… 오랜만이야.”
재현이는 작게 웃었다.
“그럼 다행이고.”
그 여름은 시끄러웠다.
그리고, 외롭지 않았다.
눈을 뜨자 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새벽 특유의 고요가 집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일어났어?”
거실에는 이미 선우가 깨어 있었다.
선우는 바닥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제대로 밝지 않은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는 모습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선우 옆에 앉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우리는 자연스럽게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오래된 앨범을 한 장씩 넘기듯,
기억들이 느리게 이어졌다.
“아, 너 괴롭히던 애들 기억나?”
선우가 문득 웃음을 참듯 말하자 나도 피식 웃었다.
“기억나지… 와, 이것도 오랜만이다.”
그 말에 나는 이미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분명 오래전 일인데도, 그 장면들은 생각보다 또렷했다.
마치 잠깐 어딘가에 보관해 두었다가 다시 꺼내 보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