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기억2

잃어버린 계절의 끝에서

by 프리지아


전학 오자마자 학교에서 제일 인기 많은 남자애들과 어울려 다니다 보니, 나를 따라다니는 좋지 않은 시선들도 자연스럽게 생겼다.

같은 반 여자애들과는 그럭저럭 잘 지냈지만, 나를 잘 모르는 아이들 사이에서의 이미지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런저런 말들이 들려왔지만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내 소문을 더 신경 쓰는 건 친구들이었다.

“도대체 그런 말들은 어디서 시작되는 거야.”

선우가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할 짓 되게 없나 보네.”

찬영이도 살짝 화가 난 얼굴이었다.

“넌 화도 안 나?”

아무 반응 없이 사진만 보고 있는 나에게 재민이 물었다.

그제야 나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눈을 마주봤다.

“너넨 그 말들 믿어?”

요즘 들리는 소문은 내가 다른 여자애들을 괴롭히고 이간질을 한다는 이야기였다.

소문 자체는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선우나 재현이, 재민이, 찬영이, 민혁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조금 궁금했다.

“믿겠어? 다 말도 안 되는 건데.”

민혁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우리 말곤 다른 사람이랑 말도 잘 안 하는 애가 뭔 이간질이야.”

선우가 웃으며 덧붙였다.

“그럼 됐어.”

나는 꽤 만족스러운 답을 들은 뒤 다시 시선을 사진으로 돌렸다.

“더 심해지면 꼭 말해.”

내 손에 들린 사진을 살짝 건드리며 재현이가 말했다.

나는 재현이를 바라보며 웃음으로 답했다.

사실, 심한 일들은 꽤 오래전부터 계속되고 있었다.

찢어진 교과서, 엉망이 된 사물함.

가끔은 복도에서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거나 일부러 어깨를 세게 부딪히고 가기도 했다.

그래도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제일 먼저 눈치챈 건 민혁이었다.

“이거 뭐야?”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내 자리에 앉아 있던 민혁이 교실로 들어오는 나를 보며 물었다.

“뭐가?”

나는 민혁의 손에 들린 교과서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며칠 전 누군가 찢어 둔 교과서였다.

버리지 못하고 서랍에 넣어둔 걸 민혁이 발견한 모양이었다.

나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아이들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버리려고 했는데 깜빡했어.”

나는 민혁의 손에 있던 교과서를 빼앗아 가방에 넣었다.

“그니까 왜 버리는데.”

민혁은 더 날카롭게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답을 들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가 말할래, 내가 말할까.”

누구에게 말한다는 건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른 애들에게 이야기하겠다는 뜻이었다.

“아니야. 진짜 별일 아니니까…”

나는 다급하게 민혁의 앞을 막아섰다.

“뭐가 아니야?”

뒷문으로 들어오던 선우였다.

그 뒤로 재현이, 재민이, 찬영이까지 따라 들어왔다.

‘하…’

나는 속으로 작은 한숨을 쉬며 가방 지퍼를 잠갔다.

“백선우, 얘 사물함 좀 열어봐.”

민혁은 뒷문 쪽 사물함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물함?”

선우가 의아한 얼굴로 내 사물함 앞으로 갔다.

“아니…”

나는 선우가 사물함을 열기 전에 막아야 했다.

그때였다.

“가만히 있어.”

내 손목을 붙잡은 건 재현이었다.

눈치 빠른 재현이는 이미 상황을 대충 알아챈 듯했다.

“뭔 일인데 사물함을…”

선우는 눈치를 보며 사물함을 열었다.

그리고 말끝을 흐렸다.

내 사물함을 본 선우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졌다.

“왜, 뭔데?”

선우 쪽으로 다가가던 재민과 찬영도 발걸음을 멈췄다.

“야… 이거 뭐야.”

선우가 등을 돌려 나에게 보여준 건, 찢어진 공책과 쓰레기로 가득 찬 사물함이었다.

나는 말없이 민혁을 노려봤다.

“설명해.”

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오히려 화가 난 표정이었다.

‘가만 보면 김민혁이 제일 무섭단 말이야.’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뭘 더 설명해. 요즘 말이 더 없어진다 했더니 이래서였구나.”

찬영이 나와 민혁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더 있어?”

아직도 내 손목을 잡고 있던 재현이가 물었다.

“교과서도 다 찢어졌던데.”

내가 답하기도 전에 민혁이 먼저 말했다.

“야!”

나는 재현이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민혁에게 소리쳤다.

“너 그래서 오늘 책 없던 거였어?”

선우가 화를 참고 있는 얼굴로 물었다.

“하…”

짧은 한숨 속에 분명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일단 자리 좀 옮기자.”

재민은 교실로 들어오는 애들을 보며 말했다.

“동아리실로 가자.”

찬영이 내 사물함 문을 닫았다.

“할 말 없어.”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보이는 그대로였다.

책은 찢어졌고, 소문은 돌고 있었고, 그런데 여기서 무엇을 더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었다.

“우리가 할 말이 있어서. 넌 그냥 들어.”

찬영은 그렇게 말하고 그대로 뒷문으로 나갔다.

나는 잠시 당황한 채 찬영이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자.”

가만히 서 있던 나를 이끈 건 재현이었다.

나는 땅을 보며 재현이에게 이끌려 동아리실로 향했다.

재현이는 내 손목을 잡고 앞장섰지만 손에는 거의 힘을 주지 않았다.

조금만 힘을 주면 뿌리칠 수 있을 정도였다.

사실 괴롭힘에 대해 말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이런 일쯤 감수하면서라도 이 애들 옆에 있고 싶었으니까.

마음이 여린 애들이라, 내가 힘들다고 한마디만 해도 나를 위해 거리를 두려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나를 향한 소문이나 시선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걷다가, 동아리실이 보일 즈음 발걸음이 멈췄다.

나는 재현이의 손목을 다른 손으로 세게 잡았다.

재현이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엇갈려 잡힌 손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재현이는 내 손을 떼어내더니, 반대 손으로 내 손을 마주 잡았다.

나는 놀라서 재현이를 올려다봤다.

“가자.”

재현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손이 왠지, 같이 있어 주겠다는 뜻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도 그 손을 조금 더 꽉 잡았다.


동아리실에 도착해 자리에 앉자 나는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괜히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아이들은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언제부터였는지, 혹시 또 다른 일은 없었는지 서로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아니, 도대체 누가 그런 거냐고.”

선우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하자 민혁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알면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겠냐.”

“너네 반에 의심 가는 애들 없어?”

찬영이 묻자 재민도 거들었다.

“어쩌면 백선우 너네 반 여자애들이 단체로 그랬을 수도 있어. 너 몰랐어?”

“아 씨… 몰라. 우리 반에 누가 있는지도 제대로 모르겠는데.”

선우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쉬는 시간 내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눴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사실, 나 역시 무언가 달라지기를 바라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일단 반으로 가자. 이제 곧 수업이야.”

재민은 흥분해 있는 선우와 찬영을 진정시키며 의자를 정리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선우와 함께 교실로 향했다.

복도를 걷다 보니 어느새 선우와 둘만 남아 있었다.

선우는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갑자기 말을 쏟아냈다.

“일단 교과서는 내 거 다 가져가. 난 공부 안 하니까. 그리고 앞으로 혼자 다니지 말고. 화장실 갈 때도 말하고. 나 자고 있으면 쉬는 시간에 꼭 깨우고. 하교도 같이해. 이제 계속 옆에 있을 거니까.”

숨도 쉬지 않고 이어지는 말들이었다.

아무 수확 없이 교실로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그 복도에서 선우가 했던 말들은 이상하게도 가슴 깊은 곳을 조여왔다.




“고마웠어. 그때, 같이 있어줘서.”

선우는 졸업할 때까지 늘 내 옆에 있어 주었다.

그래서였는지, 아니면 그 애들이 흥미를 잃어서였는지 그 이후로 여자애들의 괴롭힘은 점점 줄어들었고, 결국 그 일은 내 기억 속에서도 희미해져 갔다.

“그때 사실은… 괴롭힘보다 너희랑 멀어지는 게 더 싫었어. 착한 너희라면, 나를 위해서 멀어져 주겠다고 할 것 같았거든.”

누군가를 위한다는 말로 혼자가 되는 건 싫었다.

하지만 그날, 이제부터 함께하자고 말하던 선우의 태도는 예상 밖이었고 그래서 더 큰 위로가 되었다.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리고 이 이상한 곳에서도… 우리 함께하자. 다시 돌아가자.”

나는 선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창밖이 어두워 그의 표정이 또렷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선우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나도… 고마워.”

선우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그때… 눈 떠줘서. 지금… 같이 있어줘서.”

선우는 말끝을 흐렸다.

그가 말한 ‘그때’가 언제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찬영이와 함께 눈을 뜨지 못했던 그 순간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아이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나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침묵으로 답했다.



작가의 이전글7화, 기억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