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침묵

잃어버린 계절의 끝에서

by 프리지아


“여기 패스!”

공을 몰고 달리던 선우가 소리쳤다.

“야 뒤로 가!”

재현이가 공을 차올리며 받아쳤다.

운동장은 시끄러웠다.

여름 공기와 흙먼지가 뒤섞여 있었다.

“더워…”

나는 찬영이와 재민이 사이에 앉아 그늘을 찾고 있었다.

‘찰칵’

찬영이는 카메라를 들어 선우와 재현이를 번갈아 찍고 있었다.

민혁이와 재민이는 이어폰을 나눠 끼고 눈을 감고 있었고, 나는 그들을 보며 괜히 웃었다.


낭만이다.


“아 더워 죽겠다!”

언제 경기가 멈췄는지, 먼저 달려온 건 선우였다.

내 손에 있던 물병을 자연스럽게 가져가 단숨에 마셨다.

“끝난 거야?”

내가 묻자,

“아니. 이제 후반이지.”

숨을 고르며 웃었다.

그때 옆에서 재현이 선우 손에 들린 물병을 빼앗았다.

“덥지 않아? 안에 들어가 있어.”

말은 담담했지만 시선은 나를 먼저 확인했다.

“괜찮아. 보는 게 더 재밌어.”

나는 회색 수건을 꺼내 선우에게 건넸다.

그리고 가방을 더 뒤적였다.

“…없네.”

재현이가 물병을 흔들며 말했다.

“저기 팬들이 준 거 산더미야.”

찬영이가 벤치를 가리켰다.

이온 음료, 간식, 수건, 편지.

나는 괜히 가방에서 꺼낸 하늘색 수건을 쥔 채 가만히 있었다.

그걸 본 재현이 아무 말 없이 내 손에서 수건을 가져갔다.

“난 이거면 돼.”

선우는 그걸 보고 피식 웃었다.

“우리 인기 미쳤다니까?”

“야 바나나 우유 먹어도 돼?”

재민이가 소리쳤다.

“나도!”

찬영이가 손을 들었다.

“다 드세요~”

이번엔 선우가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바나나 우유가 하나씩 돌았다.

재민이가 아무 생각 없이 내 손에 하나를 쥐어 줬다.

‘선우야 항상 응원해’

나는 그 문구를 보고 잠깐 멈췄다.

“마셔도 돼?”

나는 선우를 봤다.

“먹어. 다 먹어.”

목에 두른 회색 수건을 툭툭 털며 웃었다.

“과자도 있어!”

그 모습을 보던 재현이 땀을 닦으며 내 옆에 잠깐 앉았다.

“쉬고 있어.”

조용히 말하고 다시 일어났다.

“다치지 마.”

내 말에 그는 고개만 끄덕였다.

“서재민보다 많이 먹어. 오빠 골 넣고 올게!”

선우가 능청스럽게 말하며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내게 건넸다.

나는 웃으며 받았다.

재현은 말없이 운동장으로 먼저 걸어갔다.

“아 축축해.”

민혁이가 재현이에게 받은 수건을 털어버렸다.

나는 다시 주워 벤치에 걸었다.

“더워서 땀 많이 흘렸나 보지.”

찬영이가 물었다.

“너 운동도 안 하면서 왜 수건 맨날 두 개 챙겨 와?”

“필요하다길래.”

민혁이가 웃었다.

“지난번에 하나 가져왔을 때 선우랑 재현이 서로 쓰겠다고 싸운 거 기억 안 나?”

나는 기억했다.

선우는 “내가 더 뛰었어!” 하고 우기고,

재현은 말없이 잡고 안 놓고.

그날 이후로 나는 꼭 두 개를 챙겨왔다.

그게 당연해졌었다.

“초딩들…”

과자를 한 움큼 안고 온 재민이가 말했다.

“우린 과자파티나 하자!”

찬영이가 환하게 웃었다.

햇빛이 벤치 끝에 걸려 있었다.


그날은,

정말 아무 일도 없을 것처럼 여름이었다.



시간이 꽤 흘렀다.

옆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민혁이를 바라보다가 이제는 정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너무 오래였다.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마찰음이 들렸다.

금속이 긁히는 것 같은,

귀를 거슬리는 소리였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끼이익—’

‘끼이이익—’


소리는 점점 길어졌고,

가까워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텅 빈 4차선 도로와 빽빽한 나무들뿐이었다.

어디서 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소리는 머릿속을 긁고 지나갔다.

숨이 가빠졌다.


그 소리와 함께,

지우려고 애써왔던 기억이 밀려왔다.


브레이크가 미친 듯이 갈리던 소리,

쏟아지던 비명,

코를 찌르던 피 냄새.


내 손은 그때처럼 축축해진 것 같았고,

시야는 천천히 흔들렸다.

나는 귀를 막았지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계속 울렸다.

그날처럼, 또 누군가를 놓칠 것 같았다.

정신을 붙잡으려는 듯 나는 민혁을 세게 끌어안았다.

아직 따뜻한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제발, 그만.

제발 멈춰.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괜찮아?”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고개를 들자 재현이가 있었다.

현실이 조금씩 돌아왔다.

“무슨 일 있었어?”

재현이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언제 흘렀는지도 모를 눈물을 엄지로 닦아냈다.

나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호흡을 가다듬는 데 한참이 걸렸다.

시야가 다시 또렷해졌을 때,

걱정스러운 얼굴의 재현이와 눈을 떼지 않고 나를 바라보는 선우가 보였다.

“괜찮아. 우리 여기 있어.”

선우는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 말이 이상하게 현실을 붙들어줬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민이는?”

조금 진정이 된 뒤에야 물을 수 있었다.

“갈림길이 있었어. 바다 쪽으로 가보려고.”

재현이는 민혁의 맥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말했다.

“일어날 수 있어?”

선우가 팔을 잡았다.

나는 품에 안고 있던 민혁을 내려다봤다.

쉽게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민혁이는 내가 업을게.”

재현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민혁을 넘기는 순간, 괜히 또 불안해졌다.

선우는 재현이가 민혁을 업는 걸 도와주고 곧바로 내 옆으로 와 나를 부축했다.

“오른발에 힘 많이 주지 마.”

재현이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갈림길까지는 생각보다 멀었다.

재현이와 선우는 번갈아 민혁을 업었다.

재현이와 선우는 나도 업어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민혁만으로도 충분히 무거워 보였다.

갈림길에 도착했을 때, 멀리 바다가 보였다.

“근데 왜 바다 쪽이야?”

선우가 물었다.

재현이는 잠시 망설이다 나를 봤다.

“그냥… 거기 있을 것 같지?”

나는 바다를 바라봤다.

“응. 재민이라면 거기 있을 것 같아.”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런 느낌이었다.

한참을 걸어도 아무도 없었다.

차도 지나가지 않았다.

이상했다.

하지만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 파도 소리가 들렸다.

‘쏴아아—’

바다 냄새가 스쳤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리고 보였다.

바닷가에 누군가 서 있었다.

“서재민 맞지?”

선우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맞아. 옷도 머리도.”

재현이가 답했다.

그 순간,

재현이 등에 업혀 있던 민혁이가 낮게 신음하며 눈을 떴다.

“민혁아!”

나는 거의 외치듯 불렀다.

재현이가 민혁을 내려놓는 걸 도왔고 선우는 한 번 얼굴을 확인하더니 곧장 재민이 쪽으로 뛰어갔다.

“괜찮아? 아픈 데 있어?”

재현이는 침착하게 물었다.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민혁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사고가 났어. 넌 한참 못 일어났고.

일단 자세한 건 나중에. 일어날 수 있어?”

“어. 가자.”

민혁이는 금방 정신을 붙잡았다.

나는 그의 팔을 잡고 얼굴을 다시 살폈다.

“괜찮아. 넌?”

“응… 다행이다.”

그제야 가슴이 조금 내려앉았다.

재현이는 잠시 우리가 잡은 손을 바라봤다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다.

“얘들아!”

재민이가 달려왔다. 그 뒤로 선우도 걸어왔다.

“다친 데 없어?”

재현이가 먼저 확인했다.

“없어. 눈 떠보니 여기였어. 너넨?”

“드디어 다 모였네.”

선우가 천천히 다가와 자연스럽게 나와 민혁의 사이에 섰다.

맞잡고 있던 손이 풀렸다.

민혁이 피식 웃었다.

“근데 여기…”

재현이가 바다를 바라보며 말을 멈췄다.

우리 모두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바다는,

그날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 봤던 바다와 너무 닮아 있었다.

파도 소리까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자…”

조용히 말했다.

여기에 오래 서 있고 싶지 않았다.

선우가 크게 외쳤다.

“가자!”

우리는 목적지도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바다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계속 밀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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