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계절의 끝에서
쪽잠을 자고 해가 떠오를 즈음,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선우와 민혁, 재현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너랑 재민이는 오늘 여기서 쉬고 있어.”
민혁이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살짝 아린 발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아… 응.”
재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준비를 마친 셋은 조용히 밖으로 나갔고, 집 안에는 재민과 나만 남았다.
재민과 나 사이에는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미안해.”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그 한마디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도.”
재민은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동안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감정들, 생각들, 후회와 죄책감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어쩐지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창민이에게 전하지 못할 진심들 같았다.
재민은 아무 말 없이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다.
모든 말을 쏟아내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재민이 입을 열었다.
“찬영이랑 나는 어릴 때부터 항상 같이 있었어.
그래서인지… 찬영이 없는 내일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나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들었다.
“사고 이후에도… 찬영이가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마지막까지도…”
재민은 잠시 말을 멈췄다.
“…실감이 안 났어.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그리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그래서 내가 널 보기 힘들었던 것 같아.”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재민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다.
“넌 사고 이후로 계속 불안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으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너를 보면… 찬영이가 더 이상 곁에 없다는 게 진짜인 것 같아서.”
재민은 잠시 시선을 떨궜다.
“그래서 널 볼 수 없었어.”
나는 줄곧 재민이 나를 원망해서 피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내 불안한 모습이 재민에게 더 큰 상처를 주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잠시 후, 재민이 다시 말했다.
“그래도… 단 한순간도 너를 원망한 적은 없어.”
그의 눈동자가 똑바로 나를 향했다.
나는 아마, 그 말을 줄곧 듣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말 한마디에, 마음속에서 겨우 버티고 있던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 뒤로 우리는 옛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재민의 앞에서 꺼내지 못했던 찬영과의 추억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재민은 이제야 찬영을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표정도 전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진작에 널 만나서 이야기할 걸 그랬어…
이렇게 입 밖으로 꺼내니까 좋다.”
재민이 후련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게… 나도.”
나는 재민을 보며 웃었다.
우리는 한동안 3년 전 이야기들을 계속했다.
함께했던 기억들을 하나씩 되짚으며, 가끔 웃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듯 내가 말했다.
“아… 사진 말이야. 찬영이 사진. 너 가지고 있어?”
“응. 다 내가 가지고 있어. 왜?”
재민이 되물었다.
“꼭 다시 봐야 하는 사진이 있어…
우리 벚꽃나무 아래에서 찍은 사진.”
벚꽃나무를 떠올리는 순간, 머릿속 어딘가에 묻혀 있던 기억이 번쩍 떠올랐다.
나는 갑자기 재민의 팔을 붙잡았다.
“벚꽃나무…! 너도 들은 적 있지?”
내 목소리가 급해졌다.
“벚꽃나무에 대해… 찬영이가 말했던 거!”
재민은 당황한 듯 나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을 하다 멈춘 재민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마치 무언가를 떠올린 것처럼.
“…들은 적 있어.”
재민이 낮게 중얼거렸다.
“이 세계에 대해서.”
순간, 잊고 있던 기억이 서서히 되살아났다.
우리는 분명,
이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찬영이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여기서 사진 찍자!”
찬영이 우리에게 소리쳤다.
그 뒤로는 커다란 벚꽃나무가 흐드러지게 펼쳐져 있었다.
고3 봄, 우리는 학교 뒤편 공터에 있는 벚꽃나무를 보러 왔었다.
“이렇게 큰 나무가 있는 줄 몰랐네.”
민혁은 고개를 들어 벚꽃나무를 올려다봤다.
“그러게. 미리 알았으면 매년 와서 사진 찍었을 텐데.”
재민은 삼각대를 세우며 카메라를 맞추고 있었다.
“하여간 저 사진쟁이들.”
선우는 재민과 찬영을 보며 투덜거렸지만, 몸은 이미 나무 앞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난 뒤 선우와 재현, 민혁은 작은 공을 꺼내 축구를 하기 시작했다. 재민은 그 모습을 찍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와 찬영은 벚꽃나무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벚꽃잎이 천천히 흩날리고 있었다.
그때 찬영이가 말했다.
“벚꽃나무에는 신기한 힘이 있어.”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3월이나 4월에 벚꽃을 보면…
올해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들지 않아?”
찬영은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 세계에서도 말이야.”
나는 찬영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그 세계?”
마침내 꽃잎 하나를 잡은 그의 손을 보며 물었다.
찬영은 그 꽃잎을 내게 건넸다.
“벚꽃나무의 세계라고 들어봤어?”
“벚꽃나무의 세계…?”
나는 꽃잎을 받아 손에 쥐었다.
그때였다.
“또 그 얘기야?”
카메라를 들고 돌아온 재민이 벤치에 털썩 앉았다.
아무래도 재민은 찬영에게 이 이야기를 한두 번 들은 게 아닌 것 같았다.
찬영은 우리 둘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 세계에서는… 아무나 벚꽃나무를 볼 수 없어.”
“그럼 누가 볼 수 있는데?”
내가 물었다.
찬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
그 뒤의 말은
기억나지 않는다.
“누가 벚꽃나무를 볼 수 있는 거야?”
나는 재민을 바라봤다.
“그럼… 볼 수 없는 사람들은?”
재민은 잠시 말이 없었다.
“…괴물이 되는 걸까?”
겁먹은 표정이었다.
우리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벚꽃나무 본 적 있어?”
“아니… 너는?”
“나도.”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애들도… 이 이야기 들은 적 있을까?”
재민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근데 아무도 벚꽃나무 얘기를 한 적은 없잖아…”
말끝이 흐려졌다.
벚꽃나무를 보지 못한 우리는 꿈이나 희망 같은 걸 가지지 못한 사람들인 걸까.
나는 한참 뒤에 말했다.
“우선… 우리끼리만 아는 걸로 하자.”
재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우리는 벚꽃나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약속했다.
누구라도 먼저 벚꽃나무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때는 서로에게 말해 주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