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존재를 존중하여라)
존재 그대로를 두고 보아라!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보아라.
깨어질세라 만지지 말아라.
입김에도 날아가 버릴까
조심조심하여라!
존재 그대로를 느끼고 또 즐겨라.
얼룩이 질세라 만지지 말아라.
혹여 당신 냄새 배일라
숨결도 조심하여라!
당신의 진심도 지나치면 안 된다.
큰물 가에서 멈추어야 한다.
물은 건너는 자는 오직
본인 이어야 한다!
세상의 존재 그대로에 감동하여라.
인위적인 치장도 절제하여라.
그 무엇도 강권하지 말고
그대로에 만족하여라!
존재하는 그대로를 존중하여라.
욕심으로 독려하지 말아라.
혹여 용기를 잃을까
응원만 해주어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나 자연의 그 무엇에도 너무 지나치게 손을 대거나 인위적인 행위를 가하게 되면, 그 형질과 특성이 변하여 아주 흉악스럽게 변해 버리기도 하고, 때로 생명에 위해한 온갖 유해 인자(유해 물질, 독극물, 온갖 위험, 곰팡이류, 변종 바이러스 등)를 마구 내뿜게 되며, 이는 우리 인간에게 또 다른 큰 재앙을 안겨주게 된다.
인간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좋은 뜻으로 행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상대를 도와주는 선에서 그쳐야 하는 것이지, 억지로 무엇을 하게끔 강권해서는 절대 안 되겠다.
즉, 당신의 좋은 뜻도 안내(guide) 정도의 수준이어야 하는 것이지, 소를 냇가로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는 행위를 강제할 수는 없듯이, 모든 것의 최종 결정은 당연히 당사자 본인이 해야 하는 것이겠다.
또한, 현재 내가 소유하고 있는 그 어떤 것도 내가 가진 게 아니라, 그저 잠시 맡은 것, 그래서 잠시 활용하고 있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모두 우리 인간의 공적 자산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심지어 자식마저도 특별한 인연으로 내가 잠시 맡아 기르게 된 것이고,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것이지, 나의 소유물은 전혀 아니지 않겠는가?
그러니, 그들의 인생은 부모가 전혀 간섭할 바 못 되며, 존귀한 그들 스스로가 온전히 짊어지고 가야 할 문제이다. 그래서 부모는 그저, 잠시 조언자의 역할 내지는 길잡이 역할만을 해주는 것이어야 하겠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스스로의 생(生)에서, 여러 집착스런 마음이나 과도한 소유욕을 제대로 떨쳐내고, 지극한 평온과 도리를 되찾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물론, 당신이 이러한 이상향을 반드시 실천해 내어야 하겠다는 욕심보다는, 최대한 거기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첫째, 고난의 닥침에도, 그대로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운명도 그대로 받아들여라.
살다 보면, 때로 어처구니없는 일도 겪게 되어있다.
옛 우리 속담에,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살다 보면, 참으로 난감하고, 마음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마저도 발생하곤 한다.
이럴 때는, 참으로 큰 허탈감과 상실감이 몰려오기도 하고, 간혹 그러한 감당할 수 없는 큰 불행이나 억울함에 몸서리가 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아무리 이를 부정하려 해 보아도, 부정이 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일뿐더러, 부정하면 할수록 더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조여오기만 할 것이다.
아무리 복수나 앙갚음을 하려 해 보아도, 오히려 자기 스스로를 심히 소모하게 되어, 고귀한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결국 고통으로 얼룩진 흔적만을 남기게 된다.
차라리, 좋았던 시절의 화려함이나 영광은 모두 잊어버려라. 오직 지금 그대로의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서, 이를 기점으로 새 마음가짐을 가져가는 것이 더 낫다.
즉, 이날부터,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새로운 탈출구를 생각하고, 새로운 희망의 싹을 틔우게 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어느 날 그 싹이 지루한 어둠을 깨고서, 화려한 본래의 모습을 다시 드러낼 때가 분명히 올 것이다.
둘째, 거추장스러운 가식과 허울을 벗어라.
가식적이고 인위적인 그 어떤 허울이나 가면도 벗도록 해보아라.
당신이 참으로 애지중지하는 물건이나 생명에도, 본질을 훼손하는 그 어떤 가짜를 덧씌우거나, 인위적 요소를 더 추가하려 하지 말아라.
옛 고사에 남귤북지(南橘北枳)란 말이 나온다.
이 말을 의역하자면, 남쪽(양자강 혹은 회수의 남쪽)의 귤을 북쪽으로 옮겨 심으면, 물과 토양의 질이 완전히 척박해지게 되므로, 더 이상 귤로 자라지 못하고, 탱자라는 보잘것없는 열매를 가진 나무로 변해버린다는 말이다.
또, 우리가 어떤 예술 작품을 완성해 나갈 때도, 욕심이 생겨 너무 덧칠을 심하게 가하거나, 치장적 요소를 지나치게 가미하게 되면, 오히려 그 작품의 기운이 쇠하게 되고, 그윽한 본연의 아름다움이나 감칠맛이 결국 사라지게 되고 만다.
그리고, 우리가 성형을 할 때도, 꼭 해야만 한다면, 자신에게 맞게 가볍게 해야 자기에게 어울릴 것이고 부작용도 적을 것이지, 지나친 욕심으로 과도한 변형을 가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또한, 자식들에게 욕심을 내어, 그 본질에 너무 간섭을 가하게 되면, 그들의 성품이 비뚤어지기 십상일 것이며, 네 주장을 너무 강권하여도, 부작용만 따를 것이고, 결국은 무슨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나거나, 당신 곁을 영영 떠나버리려 할 수도 있다.
그러니, 과연 가장 아름다운 작품은 자연 그대로의 미(美)를 바탕으로 하여야 할 것이고, 가장 맛있는 음식은 식재료 본래의 맛과 특성을 잘 살린 그러한 맛이어야 할 것이며, 가장 훌륭한 인물은 가식과 욕심이 매우 적고, 인간 본연에 보다 충실한 성품을 지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그 어디에도 지나치게 인위적인 요소를 가하거나, 가식적 요소를 마구 더해서는 안 될 것이며, 심한 덧칠로 얼룩을 지게 해서도 절대 안 되겠다.
만약 그렇게 함은 결국 그 본질을 심히 훼손하게 하여, 마치 고사에서 귤이 탱자로 변해버리듯, 지극한 아름다움마저도 아주 추함으로 바꾸어 버리고 말 것이니 말이다.
셋째, 아무도, 아무것도 신봉하지 말아라.
우리가 만약, 근거가 매우 약한 그 무엇을 신봉하게 되어 무작정 믿어버리게 되면, 마치 자신의 맑은 마음에 허깨비를 뒤집어씌워 버리는 큰 오류를 범하는 꼴이 된다.
이는 또, 당신 마음의 맑은 눈을 가짜의 가림막으로 완전히 가려 버리게 되어, 점점 당신을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인간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겠다.
그러니, 그 어떤 것도 대충대충 믿지는 말아라.
다소 맹목적인 요소나 강압적인 요소가 보인다면, 더더욱 믿지를 말아라.
세상에는 점점 더 가짜가 판을 칠 것이니, 당신의 내공을 차곡차곡 키워 나가서, 당신의 귀를 지혜의 살점으로 아주 두껍게 만들도록 해보아라. 제발 가짜와 같이 춤을 추는 어리석고 추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말아라.
자본주의의 화려함도, 돈과 권력의 권능도, 인간이 만들어낸 그 어떤 대단한 피조물도 결코 믿지 않는 것이 좋다.
당신이 믿지 않은 만큼 실망도 없을 것이니, 네 마음이 온전히 평화로울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부모에게도, 가족에게도 의지하지 말아라.
자기 생의 길은 결국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도 지는 것이니, 나중에 자신이 힘들어지게 되면 부모나 가족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는 믿음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물론, 어쩌다 기대하지 않은 도움을 우연히 받게 된다면, 아주 행복하고 감사해야 할 일이겠지만, 미리 성급한 기대를 가지지 말고, 막연히 믿고 싶고 의지하고픈 나약한 마음이거들랑 애초부터 근접하지 못하게 하여라.
넷째, 손을 댔다면 기꺼이 책임져라.
그 어디에도 당신이 손을 대고, 인위적인 영향을 가했다면, 기꺼이 책임까지 지려 하는 자세가 매우 좋겠다.
가령, 당신이 반려동물, 반려식물, 반려조류, 반려어류, 반려돌, 반려로봇 등 그 어느 것이라도 분양받아 왔다면, 이들이 잘 자라나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끝까지 책임을 지려 하는 자세를 보여주어야 한다.
만약, 분양받을 때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금방 실망을 하여 내다 버리려 하거나, 여러 못난 방식으로 내팽개치려 하는 행태는 참으로 못난 행동이라고 하겠다.
심지어는, 길가에 무심히 자라고 있는 작은 식물 하나라도, 일단 네 책상 위에 옮겨 놓았다면, 정성껏 물을 주어 가꾸고, 그 식물이 행복해질 때까지 최선을 다하려 해보는 것이 좋다.
세상에는 아주 작은 무엇 하나라도, 당신의 정성 없이 그저 이루어지는 법은 결코 없다고 보면 된다.
하물며, 당신이 인간을 대하여 도모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이 어찌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가령 작은 예로서, 어느 회사가 정식 채용 절차를 거쳐서 직원을 뽑았다면, 그들이 회사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일 것이며, 중간에 어떠한 사유가 발생했다는 핑계로, 너무나도 쉽게 그들을 내치거나, 나 몰라라 하는 태도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다.
물론 회사(경영진)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퇴사할 수밖에 없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고, 혹은 그 밖에 여러 불가피한 사건이 발생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회사가 미리 그러한 사고를 막기 위한 노력을 충분히 하였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도리를 다하였다면, 그 책임으로부터도 그만큼 자유로워질 수는 있겠다.
다섯째, 짧은 생에 오히려 감사하여라.
생(生)은, 사실 짧기 때문에 찬란할 수 있고, 아주 소중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인간의 생이 아주 길거나 영원하다면, 무슨 가치가 있을 수 있을 것이며, 사람들은 무엇하러 굳이 그렇게 열심히 살려고 하겠는가?
대충대충 살아도, 나중에 얼마든지 더 기회가 많이 있을 것이니 말이다. 이는 분명 신의 뜻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그러니, 죽음에 대해서는 그저 옆에 와 있는 친구처럼, 아주 편안하고 담담하게 바라보면 된다.
역설적으로는, 우리의 생이 매우 짧아서, 참으로 고맙다고 해야 마땅하겠다.
인생이 아주 길다면, 엄청나게 더 수고를 많이 하여야 하고, 아픔과 고통과 상처마저도 그만큼 더 계속될 것이니 말이다.
과연, 그것이 짧아서, 인간이 자기 미션에 매우 집중하여 살 수 있고, 일정한 수고 이후에는. 더 이상의 노고를 많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겠고, 적당한 시기가 되면 편히 쉴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니, 오히려 참으로 고마워해야 마땅하다고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저,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추구하고, 열심히 방황하고, 양심으로 행동하고, 또 무슨 일이든 정성으로 도모하고, 때로 재미있게 즐기기도 해보는 것이 최선이겠다!
과연,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약 1,500년 전에 원효대사가 말했듯, 세상의 모든 길흉화복과 천 가지의 자기 모습은 모두 자기 마음속에 달려있는 것이겠다.
결론적으로,
세상에 무슨 덧칠을 자꾸 하려 하지 말아라.
가급적, 맑은 눈으로 존재 그대로를 지혜롭게 바라보아라.
세상을 욕심이나 집착의 눈으로도 결코 바라보지 말아라.
오직 그대로를 보려 하고, 그대로를 말하여라.
또, 아무것이나 믿지 말고, 허깨비를 신봉하지는 더더욱 말 것이며, 오직 존재 그대로의 맑은 본질을 보려 하여라!
또한, 항상 당신의 운명을 기꺼이 인정하고, 지금 그 어떤 촌각이라도 항상 감사히 생각하고, 감사히 사용하여라.
당신의 운명이 언제까지 유지되는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촌각도 허락해 준 당신의 신께 항상 감사해야 할 것이며, 모든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모든 생명의 몸짓에는 늘 감격하고, 자연의 거짓 없고 거침없는 모습에는 늘 감탄을 마다하지 말아야 하겠다!
그저, 당신의 운명이 주어지는 한, 자기가 설정한 삶의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무엇보다 네 생의 가치에 집중하여라.
만약, 네 생의 미션이나 가치를 모르겠다면, 그것을 알 때까지 끝까지 추구하고, 질문하고, 때로 방황해도 좋다!
당신이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응답이 올 것이다.
아니, 설령 응답을 못 받는다고 하더라도, 질문 그 자체에 답이 있거나, 깨우침이 있을 것이다.
그 모든 당신의 추구와 방황과 노고는, 오직 당신의 신께서 이런 말씀을 해줄 때까지 지속되게 하여라.
“자, 당신은 이제까지 참으로 수고했구나!
고맙다!, 이제 좀 편히 쉬어도 되겠네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