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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정수 May 11. 2024

겸손과 오만의 무게

겸손하면 오래가고, 오만하면 짧게 끝난다(그림;.forbes.com)


     

     “겸손하면 그 영광을 오랫동안 잡아둘 수 있고, 오만하면 그 영화가 빨리 날아가 버린다!”     


 신은 언제나 겸손한 자에게는, 현재 가진 것을 오랫동안 잡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고, 거기에 미래를 위한 밑천까지도 두둑이 보태어 주는 법이다.

 그러나, 오만한 자에게는 현재 가진 것을 금방 뺏어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미래에 쓸 밑천(정상적이고 지속 가능한 삶의 동력, 의욕 등) 마저도 날아가게 해 버린다.    

 

 그래서, 누구나 겸손한 자이고 싶기는 하겠지만, 세상에는 심적으로 충동이나 욕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남에게 절대 지지 않고 싶은 마음, 마구 나서서 자랑하고 싶은 마음, 한번 번쩍번쩍하게 살아보고 싶은 마음의 유혹 등이 워낙 큰지라, 가희 자기 마음을 겸손하고 고요하게 잘 제어해 나가기가 아주 어렵게 되어있다,

 실시간 주변인이나 유명인의 소식이 바로바로 공유되고 있는 오늘날 모바일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겸손한 사람은 사실, 스스로를 매우 낮춘다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존감을 잘 끌어올리고, 상대를 최대한 높여주려는 사람에 더 가까울 수 있다.

 반면에, 오만한 사람은 스스로를 매우 높이고, 치켜세운다기보다는 오히려, 쓸데없는 일에 자기 자존심을 내세우고, 상대의 인격이나 입장을 마구 깔아뭉개려 하는 심성을 가진 자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그래서 오만한 사람은, 이러한 악덕의 후유증으로 인해, 어쩌다 찾아온 자기 행운도 금방 잃어버리게 되고, 또다시 차갑고 험한 길거리로 내몰리게 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자기 생의 기운이 점차 쇠하여 계속 쪼그라들어가기만 하는 형국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렇게 겸손한 사람과 오만한 사람의 차이가 ‘천양지차’만큼이나 크게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 주요한 이유를 몇 가지 살펴보기로 하자.      

              

“겸손하면 오래가고, 오만하면 짧게 끝난다!”(그림; .forbes.com/sites/nicolelipkin/2020/03/03)



 첫째, 에너지 소모의 문제이다.     


 만약, 사람이 매우 오만하여, 자기 자랑이 지나치거나, 타인을 무시하는 자일 경우에는, 현재 자기가 가진 것을 계속 지켜내거나 자기가 한 말을 관철해 내기 위해서 스스로 자기 에너지를 많이 소모해야 하고, 신경도 많이 써야 하며, 기타 가용할만한 여러 종류의 자기 자산도 모조리 당겨 쓸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결국은 자기 에너지(힘, 자산, 재화, 재주, 기술, 자기 신경과 정신 등 가용할만한 유무형의 재산 전체)를 모두 고갈시키게 되어 더 이상 사용할 에너지가 없어지게 될 수 있으며, 또 자기 정신이나 신경마저도 매우 예민하게 만들어 외부 스트레스에 무방비로 노출되게 하여, 더 이상 버텨낼 재간이 없을 정도로 탈진 상태가 되어버리기도 십상이다.

 이렇게 자기 소중한 에너지를 마구 소모해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탕진되고, 미래에 사용해야 할 자기 밑천마저도 탈탈 털리는 격이 되어버려, 결국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반면에, 사람이 아주 겸손하여, 항상 신의 뜻(진실과 진리, 마땅한 도리 등)에 경외하고, 타인의 말과 입장을 진정으로 존중하는 경우라면, 이는 바닥의 마음을 가진 상태와 유사해져서 더 이상 추락할 곳 자체가 없겠으며, 모든 면에서 스스로 채워질 방향 혹은 상승의 방향만 남게 되겠다. 

 그리고, 이렇게 매우 낮은 자세로 자기 일을 하나하나 처리해 나가다 보면, 그 속에서 많은 시너지의 효과를 가져와, 자기 삶의 내공이 눈덩이처럼 계속 불어날 수도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현재의 형편을 많이 개선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미래에 사용할 밑천과, 나중에 위기 시에 사용할 수 있는 밑천마저도 덤으로 얻을 수 있게 되어, 자기 물질적·정신적 창고가 각종 에너지로 넘쳐나는 격이 될 수 있겠다.

 이는 어쩌면, 스스로 매우 낮은 곳을 자신 있게 선택할 수 있었던 용기, 상대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높여줄 수 있었던 자기 자존감 등에 대한 신의 작은 보상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둘째, 초조함의 문제이다.     


 사람이 매우 오만하여, 허세나 자기 자랑이 심하고 상대를 쉬이 하대하려는 경우에는, 현재 자기가 가진 것, 지니고 있는 지위나 명예 등을 지켜내기 위한 초조함 혹은 조바심이 아주 쉽게 생겨날 수 있다.

 특히, 자기 생(生)에서 위기에 몰리게 되는 경우에는 더욱 이러한 현상이 심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한번 생겨나면, 그 추락의 속도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즉, 평시의 오만함이 위기의 상황에서는 초조함이나 조바심을 불러내고, 이는 다시 자기 위기를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고, 이러한 위기의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다시 더욱 오만해질 수밖에 없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전한 파탄이 나기 이전까지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가 그치지 않을 수 있다.

 이 경우는, 마치 추락의 가속 페달을 밟게 되는 상황에 해당할 수 있을 것이니, 매사가 얼마나 암울할 것이며,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의 터널이라고도 아니할 수 있겠는가?     


 반면에 몸소 겸손의 자세, 즉 매우 낮은 자세로 모든 일에 임하게 되면, 과연 초조할 것이 무에 있겠는가?

 조바심이 왜 생겨날 수 있겠는가?

 또,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 마음 자체가 바닥으로부터 출발하는 낮은 마음일진대, 더 이상 추락할 곳도, 더 이상 부딪힐 것도 없고, 오직 나아갈 방향은 기운 상승의 방향뿐이다.


 오직 편안한 마음으로부터 무엇이든 잘 해낼 수밖에 없는 상태, 많은 것을 얻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어줄 것이다.

 즉, 이 경우는 추락의 가속 페달이 아닌 기운 상승의 가속 페달을 밟게 되는 상황에 해당할 것이니, 얼마나 매사 신나고 행복한 일로 가득하겠는가?     


 셋째, 자랑과 허세의 문제이다.  

   

 사람이 자기 자랑이나 허세가 지나치거나, 그 맛에 푹 빠져 살게 되면, 마치 구름 위를 걷는 형국이 되어, 위태롭기 그지없을 것이며, 나중에 결국은 매우 허무하고 무상함만이 몰려올 수 있다.

 생(生)이라는 것은 원래가 굴곡의 심한 길이니만큼, 그도 언젠가는 하강 곡선을 심하게 그을 수밖에 없을 터인데, 그때는 또 어찌하려 하는가?   

  

 차라리 자기 자랑이라도 줄였더라면, 허세와 가오라도 좀 줄였더라면, ‘안하무인’ 하는 마음이라도 잘 줄였더라면, 그 충격이 훨씬 덜 하였을 터인데, 그 엄청나게 몰려올 충격의 거센 파도는 과연 어찌 감당하려는가?

 그러니, 사람은 매사, 아무리 잘 나갈 때에도, 아무리 우쭐한 기분이 심히 들 때에도, 아주 큰 성취를 이루었어도, 자기 말과 행동에 있어서 자중을 잘해야 하고, 특히 무엇보다 상대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어루만질 줄 알아야 한다.     


 즉, 자기보다 더 못 가진 사람, 자기보다 더 못난 사람, 자기 삶에서 무엇인가 성취한 것이 거의 없는 사람 등에 대한 배려가 그득하게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당신의 자랑과 허세가 크면 클수록, 오만함과 무도함이 크면 클수록, ‘안하무인’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상대의 마음에 깊은 생채기를 내면 낼수록, 거센 파도는 당신을 금방이라도 삼켜버릴 수 있을 것이다.     

         

“오만한 자의 영화는 금방 끝나 버린다!”(그림; .preceptaustin.org/the_great_tribulation)



 넷째, ‘이성의 힘’의 문제이다. 

     

 오만한 사람은 자신의 영화가 ‘일장춘몽’처럼 금방 끝나버리고, 결국은 추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니, 이러한 다소 충격적인 여정에서, 자기 이성을 상실하기가 쉬워지고, 결국은 자기 삶의 아주 중요한 길목에서 매우 엉뚱한 판단을 내리기 쉽게 되어있다.

 예를 들어, 매우 가치 없는 곳에 투자를 하거나, 크게 잘못된 결정을 하게 되거나, 이유 없이 늘 화를 내거나, 심지어는 자기 타깃(목표나 목적)과 초점(실제 자기 행동의 방향)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행동도 많이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에게는 더욱 손실이 가중된다.

 자기 재산도, 의지도, 의욕도 모두 잃어버리기 쉽다.

 그런데 더욱 무서운 것은,

  “끓는 물속의 개구리(boiling frog ; 만약 개구리를 점점 따뜻해지는 물속에 넣으면, 점점 뜨거워져 죽게 되는 위험에 대한 감지를 전혀 하지 못하여, 결국은 죽게 된다)”라는 이야기가 있듯이, 적절한 시기에 철군을 하기도 매우 어려워져, 결국은 빠르게 무너져갈 수밖에 없다는 점일 것이다.     


 즉, 무엇인가 중요한 위기를 감지하여야, 적절한 시기에 철군을 하든지, 철수를 하든지가 가능할 터인데, 개구리를 삶는 경우처럼 물의 온도가 아주 서서히 올라가서, 자신도 그 위기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무너져 가는 도중에라도 무엇인가 대책을 세워보아야 할 터인 데, 모든 것이 무방비 상태로 되어버리고, 아무리 헤어 나오려 해 보아도, 거의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되어버린다.      


 반면에, 늘 겸손한 사람은, 이성의 힘이 항상 살아있어서, 매사 그 판단이 예리한 편이고, 매우 합리적이며, 무엇보다 타인을 존중하려는 마음이 강한 터라, 늘 타인의 말을 귀담아들으려 하고, 타산지석(하찮은 남의 언행일지라도 자신을 수양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음) 또한 잘 실천하여 매사 위험이 상당히 적은 편일 것이다.   

  

 그는 항상 매우 낮고 기본에 충실한 자세를 취하게 됨으로써, 혹여 무슨 크고 작은 위험이 몰려오더라도, 금방 알아차리거나 초기에 미리 대비도 잘하여, 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해 낼 가능성도 매우 크다고 하겠다.

 즉, 위험을 항상 미리 대비하고, 타인의 지적을 잘 받아들여 준비하게 되니, 평시에 별 위험이 없을 수 있고, 설사 어떤 위험이 닥치게 되더라도 찻잔 속에 미풍에 그치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문득,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에서, 너무나도 오만하기만 한 나폴레옹을 두고서 언급한 구절이 떠오른다.     

       “신은 파멸하려는 자에게서 먼저 이성을 빼앗는다!” 

    

 다섯째, 태도의 문제이다.     


 오만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상대가 아무리 좋은 조언을 해주어도, 결코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늘 자기 고집에 사로잡혀 있거나, 자기가 최고인 양 생각하려 하고, 또 항상 그렇게 행동도 하려 하니, 타인의 조언이 결코 귀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며,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더더욱 못할 것이다.


 이들은, 설령 매우 가까운 사람이 엄청난 팁이나 비법을 알려주어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할 것이며, 아무리 마음으로 위해주려 하여도, 아무리 도와주려 하여도, 모든 것이 공허한 메아리로 다시 반사되어 돌아올 것이다.

 아니, 이미 자기 자랑이나 가오, 허세, 위압 등에 눈이 멀어, 그 어떠한 조언도 아예 들리지 않는 상태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반면에, 겸손한 사람은 타인의 조언을 아주 잘 받아들일 것이고, 타인의 실수나 단점에도 결코 비웃지 않고 오히려 반면교사로 삼으려 할 것이며, 그래서 자기 생각과 행동을 흔쾌히 개선하고, 진보시켜 나가기가 아주 용이한 편일 것이다.

 그의 마음은 항상 열려있어, 어떤 조언도, 그것이 매우 합리적이라면, 아주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상황이 이러하니, 겸손한 자의 마음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나가서, 큰 시너지를 얻게 될 것이며, 마침내 자기 생(生)에서 아주 큰 일을 일구어낼 수 있겠다.     


 우리에게 너무도 그 이름이 잘 알려진,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도 초창기에는 매우 까칠하고 오만하였으며, 코치의 조언도 잘 듣지 않았고, 아주 모난 성격의 대명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여러 스캔들, 부상, 특히 선수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엄청난 허리 수술 이후에는 아주 상냥하고 공손한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는 생의 여러 모퉁이에서, 세찬 시련을 겪으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나중에는 엄청나게 겸손해질 수가 있었고, 그러한 겸손의 마음으로 결국은 재기에 멋지게 성공할 수 있었으며,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될 수 있었던 것이겠다. 

                    

“당신의 오만함으로 인하여, 좋은 사람들이 당신 곁을 떠나게 하지 말아라!”(그림; bmamissions.org/leading-requires-humility)



 여섯째, 주변 인복의 문제이다.  

   

 보통 오만한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들이 붙어있으려 하지 않고, 모두들 떠나가게 마련이다.

 특히 그에게 정말 보배일수록, 매우 중요한 사람일수록 제일 먼저 떠나려 할 것이다.

 이렇게 되어, 점차 많은 소중한 인재들을 잃을 수밖에 없게 되고, 그의 곁에 여전히 남아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통해 얻어갈 것이 있은 사람이거나, 앞으로 무슨 또 다른 꿍꿍이속을 도모하려는 사람들에 불과할 것이다.     


 오만한 사람은 작은 것에도 거드름을 피우거나, 상대를 쉬이 무시하기도 쉽고, 만약 어려운 상황이 닥치게 되면, 더욱 이러한 특성이 심화될 것이니, 과연 누가 있어, 오래도록 그의 곁에 붙어있으려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사람들이 자기 주변에서 점점 떠나게 되는 신호는 무엇인가 자신에게 위험이 오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으니, 이럴 때일수록, 누구든 아주 조심을 하여야 하겠다.   

  

 반면에, 겸손한 사람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는 환경이 잘 조성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항상 상대를 존중해 주고, 매우 신사적일 것이며, 특히 위험한 일이거나 손해를 보아야 할 상황에서는 자신이 고스란히 떠안으려 하는 다소 대범한 심장을 가진 경우가 많아서, 같이 일하고, 같이 거래하기에 매우 안정적이고 편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단지, 여기서 혹시라도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이, 겸손이라는 것은 단순히 착하거나, 순하거나, 소극적인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진정한 겸손이라는 것은 자신이 이미 어느 정도 내공이 가득 차 있는 상태에서도, 상대를 배려하거나, 잘 헤아리기 위해서 오히려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매우 낮은 곳으로 향하는 마음이겠다.

 또는, 자신이 이미 큰 내공을 지녔지만, 그래도 여전히 세상을 경외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잘 인지하여, 진정한 배움의 자세로 기꺼이 아래로 향하려 하는 마음이겠다.  

        

 결론적으로,     


 위에서 우리는, 신은 겸손한 자에게는, 현재 가진 것을 오래 잡아 유지할 수 있게 해 줄 뿐만 아니라, 그가 미래에 쓸 밑천까지 두둑이 보태어 주려 하고, 오만한 자에게는 현재 가진 것과 미래의 밑천까지 모두 모두 빼앗아버리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 중요한 부분을 살펴보았는데, 이렇게 그 이유에 대해서 잘 이해하였다고 하여, 결코 누구나 쉽게 이러한 겸손을 제대로 지닐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겸손을 스스로 잘 체득하기 위해서는, 물론 원래 타고난 성격이나 기질 측면에서의 우열도 일부는 있겠지만, 그보다 더 크게는, 참으로 자기 삶에서 많은 내공과 숙련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며, 때로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경우도 있다.

 그러나, 위에서 잘 살펴보았지만, 세상은 분명히 ‘겸손한 사람’과 ‘겸손하지 못한 사람 혹은 오만한 사람’으로 크게 양분될 수 있을 것이고, 이 둘의 격차는 아마 매우 크지 않을 수 없겠으며, 특히 그 격차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천양지차’처럼 크게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우리가, 제대로 된 겸손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많이 배워야 하고, 책도 많이 보아야 하고, 많이 사색하고, 많이 깨달아야 하며, 이런저런 인생 공부도 많이 하여야 할 것이고, 때로는 많은 시행착오를 통하여 인생의 쓴맛을 많이 보아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어쨌든 결국은, 「예기」의 가르침처럼, “배운 연후에야 자신의 부족함을 알 수 있음(學然後知不足)”을 제대로 새길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이 가르침에서 “부족함을 알 수 있음”이라는 구절은, 결국은 참된 ‘겸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겸손’이라는 것은 그저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올려주려는 자세 이상으로, 반드시 아래와 같은 지극한 마음이 그 대전제가 되어야 하겠다!   

   

      “배우면 배울수록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깊은 성찰과 뼈저린 인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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