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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롬 Dec 14. 2023

내가 철없는 건 다 남편 때문이다.

주말 아침. 타닥타닥 희미하게 들려오는 타자 소리에 깼다. 주말 치고는 일찍 일어났다 싶었는데, 역시 먼저 일어난 건 남편이었다. 안 봐도 눈에 그려진다. 그는 분명 거실의 본인 책상에 앉아 헤드셋을 끼고 키보드를 치고 있을 것이다. 그가 못 들을 건 알지만, 괜히 크게 뒤척이며 소리를 냈다. 막 일어나 조금 추운 탓에 남편에게 안기고 싶었다. 아직 잠에서 덜 깨어 이렇게 몽롱한 채로 포근하게 안기고, 그의 뭉근한 체향을 맡고 싶었다. 내가 깬 것을 알면 분명 여기로 올 텐데, 눈을 떴음을 알리기 위해 열심히 움직여봤지만 여전히 들리는 타닥타닥 소리.



어쨌든 화장실이 침실 맞은 편에 있으니 언젠간 나를 발견하겠다 싶었다. 그렇게 버티다 아침의 몽롱함이 거의 사라질 즈음, 남편은 화장실을 자주 안 간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대로라면 영원히 발견되지 못할 것 같아 나는 결국 터덜터덜 거실로 나갔다. 예상했던 모습이었다. 노이즈캔슬링이 확실히 되는 헤드셋 덕에 그는 내가 바로 뒤까지 와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다 음침한 내 그림자를 보고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고, 나는 졸린 척 멀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아구구, 일어났어? 깼는데 내가 없어서 데리러 온거야?

(끄-덕)

아구. 그래 얼른 침대로 가자. 조금 뒹구르르 하다 씻자.

(끄덕끄덕, 손 잡고 침실로 간다.)



언젠가부터 시작된 이 주말 아침의 익숙한 패턴. 침대에서는 딱히 무언가 거창한 짓을 하진 않고, 그냥 내가 남편에게 푹 안겨있는다. 더 세게 안아줘, 팔 조물조물해줘, 이마에 뽀뽀해 등 아침부터 다소 피곤한 요구에도 군말 없이 해주는 그. 그러다 문득 너무 게으르게 있나, 싶은 생각이 들 때쯤 내 몸에 얹어져 있는 남편의 팔을 슬쩍 내리며 말한다. 이제 난 씻으러 갈게. 그러면 그는 은근하게 웃는다. 그러고는 묻는다. 아침 뭐 먹을래? 먹고 카페 가자.



나는 때때로 생각한다. 내가 나이에 비해 철이 없는 것 같다고. 그리고 그건 어쩌면 남편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하필 한창 애 티를 벗고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나야 하는 시기에 만난 그는, 나를 마치 어화둥둥 돌봐야 하는 어린애처럼 대했다. 나한테 유난히 약한 우리 아빠보다도 훨씬 오냐오냐 하면서. 그리고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도 역시 그렇다. 그래, 그 때문이지.



그러니까, 내가 철이 없는 건 사실 남편 때문이다.

아. 이대로 평생 철없을 수 있다면, 다른 소원이 없을텐데



2023.10. 폴란드 우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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