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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롬 Jan 17. 2024

남편이 남자가 되는 순간

내 남편을 꽤 오래 봐왔다. 스무 살 때부터 봐왔으니 이젠 그의 구석구석 모든 곳이 익숙하다. 그래서 그런가. 늘 친구처럼 지내서 그런가. 나와 그의 덩치가 비슷하다 생각해 왔다. 181cm와 162cm의 키도 그리 많이 차이 나는 것은 아니고, 남편은 나보다 얼굴도 작기에 더더욱. 그가 나보다 크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다. 얼마전까진.



몇 주 전, 폴란드의 엄청난 연초 세일에 우리는 ZARA를 거의 털다시피 했다. 남편의 쇼핑목록 중 연한 갈색 코듀로이 바지가 있었는데, 그는 그것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회사에도 자주 입고 다니더라. 그리고 그가 퇴근을 한 어느 저녁. 피자를 먹고 소파 양쪽에 길게 누웠다. 그날도 남편은 그 코듀로이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유난히 보드랍고 예뻐 보이더라.



"너 바지 한번 입어 봐도 돼? 되게 예쁘다."



Unsplash, Alessia C



하의는 아니었지만, 품이 큰 상의는 평소 넉넉핏으로 자주 공유했기에 저 바지도 분명 나에게 잘 맞을 것이라 생각했다. 부부는 원래 이렇게 옷값을 아끼는 거라며. 남편은 이거? 너한텐 안 맞지,라고 웃으면서도 곧바로 벗어줬다. 하루종일 입고 있어 남편의 체향이 진하게 밴 그것을 받아 들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아니, 무슨 바지가 이렇게 크지? 이상하다. 분명 눈으로 보기에 남편은 나랑 비슷한 사이즈인데.



어딘가 이상했지만 그래도 한쪽 다리를 넣어봤다. 허- 한쪽에 두 다리를 다 넣어도 되겠네. 곧이어 다른 쪽에도 다리를 넣고 허리 버튼까지 채웠다. 다 입고 보니 더 가관이었다. 두 번 정도 가볍게 뛰니 바지가 주르륵 벗겨졌다.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남편을 보고서는, 그의 하체를 다시 체크했다. 좀 큰가. 너 내 바지 입어볼래? 하니 그는 발목도 안 들어간다며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주섬주섬 다시 본인의 코듀로이를 가져가서 입는 남편. 허리까지 잠그자 아주 딱 맞는 그 옷. 확실히 네가 나보단 많이 큰가 보다. 그제야 더 보이는 그의 큰 손이나 툭 튀어나온 목젖, 유럽에서도 작지 않은 사이즈의 발과 저녁이 되어 올라온 까슬한 수염.



후웅-괜히 콧소리를 내며 남편에게 폭 안겼다. 아, 이제 육안으로도 확실히 알겠다. 남편은 덩치가 크구나. 그의 목에 뽀뽀를 하자 그는 내 이마에 뽀뽀를 했다. 친구이자 동료, 연인이자 배우자. 복합적인 우리의 관계 속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단연 동갑내기 '친구' 포지션일텐데, 이럴 때가 있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급격히 바뀌는. 평소엔 마냥 애기같아 보이는 사람이 문득 나와는 다른 성별임을 자각하게 되는. 오래 알던 사람에게서 낯선 느낌을 받아 마음이 간질간질한, 그런 때. 그래서 역시 우리의 제1정체성은 연인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 순간들.



그런 때는 드라마나 영화나 웹툰의 생각지도 못했던 빨간 장면이 불러오기도, 별 생각 없이 시작한 조물조물 스킨십이 불러오기도, 체질상 술이 안받는 남편 옆에서 나 혼자 마시는 술이 불러오기도, 생경한 여행지에서의 기분좋은 낯섦이 불러오기도 하는데, 그래. 이 날은 코듀로이 바지였다. 그 요망한 연갈색 코듀로이 바지가 그랬다.



결국 그날은 남은 피자를 더 못 먹었다는 그런 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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