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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롬 Dec 27. 2023

내가 우울증에 안 걸리는 이유

바르샤바 크리스마스 마켓을 다녀온 크리스마스 당일 저녁. 찬바람을 많이 맞은 탓에 얼얼해진 얼굴을 녹이며 남편이 지글지글 보글보글 정성스레 차려준 밥을 먹었다. 양껏 먹어 통통해진 배를 두들기며 크리스마스 영화를 골랐다. 큰 TV로 겨울왕국을 틀어놓고, 소파 양끝에 기대어 각자 폰을 보는 시간.



그러다 문득 든 생각. 아, 올해도 이렇게 끝이 나는구나. 올해 마지막 목표는 폴란드어 기본 책을 다 떼는 것이었는데 헝가리 여행이다 연말이다 뭐다 해서 결국 못했어. 오늘로 벌써 2주째 손 놓고 있잖아. 난 왜 뭣하나 꾸준히 하는 게 없을까. 아니, 이래서야 무슨 큰일을 하겠어!



부릉부릉. 또 시동이 걸린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생각. 나는야 INTJ, 생각과 망상을 자주 해 우울증에 가장 걸리기 쉽다는 바로 그 인티제. 유쾌한 낙관주의자가 되는 것이 하나의 목표일 만큼 음울한 생각으로 스스로를 자주 괴롭히는 나는, 성향만 놓고 본다면 마땅히 우울증에 몇 번이나 빠지고도 남았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내 오랜 연인 덕분이겠다.





폴란드어 공부도 성실히 못하는데 대체 무슨 큰일을 하겠냐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허리가 아파왔고, 나는 남편과 같이 누워있던 거실 소파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안방의 침대로 갔다. 그러고 5분 정도 지났을까, 도도도도 남편이 따라왔다.



"오잉, 왜 들어왔어? 나랑 같이 거실에서 놀자!"

"아, 나 허리 아파서 조금 누워있으려고."

"괜찮아? 그럼 내가 노트북 들고 옆으로 올게."

"있지. 나는 뭘 잘할 수 있을까 아직도 모르겠어."

"뭐야 뭐야. 얼른 다 얘기해 봐. 다 털어놔 봐!"



허리 아프다고 하다가 별안간 신세한탄을 하는 나에게 남편은 몸을 바짝 붙여왔다. 대자로 누워있는 내 옆에 인어공주처럼 살포시 누워서는 세상 너그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털어놓으라는 듯 손짓을 했다. 못 이기는 척 나의 무기력함과 게으름에 대해 얘기를 시작하자 그는 내 이마를 쓰다듬거나 가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우리 같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내가 늘 말하지만, 너는 뭐든 해낼 수 있는 사람이야. 나는 네가 잠재력이 엄청 큰 사람이라고 생각해.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연말에 게을러지는 거? 그거 당연한 거야. 나도 그래. 그런 것쯤이야 방향만 잘 설정해 놓고 다시 시작하면 돼. 내일 같이 카페 가서 나랑 내년 계획 짜보자.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 일단 놀자!"


"그, 그런가? 헤헤."






이런 대화는 우리 집의 익숙한 패턴이다. 혼자 땅을 파서 우울 근처에만 가려해도 남편은 나를 들어 올린다. 꾸물꾸물 가라앉으려는 기미가 보이는 즉시 머리채를 잡고 뭍으로 끌어올린다. 우울 따위 같은 것이 다가오려하면 뺨을 쳐서 날려버리듯이. 그러고는 일단 숨을 쉬게 한다. 환기를 시키며 다그치거나 답답해하지 않고 끊임없이 다독인다. 마치 무슨 심리상담 프로그램처럼.



나는 널 다 이해해. 나는 알아. 너는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예쁘고 귀여워. 그러니 가라앉아있지 마. 내가 항상 옆에 있을게. 그럴 일은 없겠지만 네가 진짜 다 실패해도 너한테는 내가 있잖아. 다희야, 너는 나한테 전부 기대도 돼.



서른 살 인생에서, 이런 성격을 가지고도 용케 우울증에 걸리지 않은 것. 나는 그 이유를 줄곧 나에게서 찾았었다. 나의 이 '빠른 회복력'과 '장점을 크게 보는' 점이 평생 나를 보호막처럼 둘러싸고 있어 우울을 튕겨냈던 것이라고. 근데 아니더라. 그것들의 역할은 작았고, 사실 내 전체를 우직하게 감싸고 대부분의 우울을 쳐내는 보호막은 내 남편이었다.



연인으로 지낸 8년 동안 그는 나를 지켰다. 마을 어귀를 지키는 정승처럼 내 옆에 딱 붙어서서는 그렇게. 생각이 많은 나는 문지기 같은 남편을 보며 또 생각한다. 나를 만든 조물주가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 더미에 쉬이 잠식당하는 성격을 줘서 미안해. 대신, 너에게 요정을 하나 보내줄게.



그러니까, 남편이 나의 팅커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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