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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롬 Jan 20. 2024

계획대로 되는 여행은 없다.

핀란드 야간열차가 취소된 날

우리 부부의 핀란드 이동 일정은 이랬다. 헬싱키에서 로바니에미로, 로바니에미에서 소단퀼레로 그리고 사리셀카까지 갔다가 다시 그대로 돌아오는 경로. 헬싱키에서 로바니에미로 갈 때는 11시간이 넘게 걸리는 야간열차를 타기로 했다. 아찔한 핀란드의 숙박비도 아낄 겸 해서. 새로운 것에 눈을 반짝이는 남편은 이를 무척 설레했다. 나 또한 동남아에서 슬리핑버스를 타본 적은 있으나 유럽에서는 이동수단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 처음이라 기대하긴 마찬가지.


헬싱키에서 한참을 놀다 따뜻한 커피를 찾아 카페로 들어갔다. 나와 남편은 북유럽의 스타벅스인 'Espresso House'에 앉아 지나간 핀란드와 다가올 핀란드를 얘기했고, 오늘 탈 열차 표를 한번 더 확인하며 볼만한 영화를 다운로드하고 있었다. 밤 11시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서 자고 일어나면 산타가 사는 로바니에미에 와 있을 것이고, 무사히 렌터카를 픽업해서 산타 마을로 이동하면 된다. 착착 들어맞는 완벽한 계획.


야간열차는 과연 어떨까, 남편이랑 설레하며 까르르 하던 중 메일 하나를 받았다. 핀란드 철도청으로부터 온 것이었는데, 핀란드어와 영어로 꽤 길게 적힌 그것의 내용은 이랬다. 


지난주의 강추위로 인해 열차 내 화장실이 고장 났다. 몇 개의 화장실은 이용 가능하고, 열차는 정상적으로 운행할 예정이나 이로 인해 열차 이용에 불편함이 있을 것이라 예상되니 보상을 해주겠다. 오늘 열차를 이용하지 않는다면 오늘 묵을 호텔 비용과 새로운 열차 티켓을 구매하고, 청구해라.


아아, 11시간이 넘는 야간열차에서 화장실이 고장 났다니. 공용 욕실이 부담되어 일부러 샤워실이 포함된 전체 캐빈을 예약했건만. 우리는 까르르 웃다가 급격히 진지해졌다. 그렇다고 좌절하거나 하진 않았는데, 여행 계획은 틀어지라고 있는 것이니까. 열차를 타기까지 남은 시간은 약 7시간. 빠른 결정을 해야 했다. 헬싱키에 하루 더 묵을 것이냐 아님 조금 불편하더라도 오늘 갈 것이냐.


사실 호텔비와 새 열차 티켓이 지원이 되니 당연히 전자를 택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겠지만 몇 가지 주춤하는 부분들이 보였다. 목적지인 로바니에미에 렌터카를 예약해 놨기에 어쨌거나 내일 오후까지는 가야 한다는 점. 그런데 낮에 타는 열차는 야간열차처럼 침대가 있거나 하진 않아서 8시간을 의자에 꼿꼿이 앉아 있어야 한다는 점. 전자를 택하면 타야 하는 Intercity 고속철 후기를 찾아보며 고민했다.




뭐, 화장실 없는 야간열차보다야 낫겠지!


결국 하루 더 묵고 간다고 결정했고, 헬싱키의 호텔과 다음 날 티켓을 구매해야 했다. 그런데 우린 여행을 그렇게 많이 다니면서도 호텔 비용 지원해 주는 보상이 처음이라 상한선이 있는지를 모르겠더라. 전화를 했더니 도통 받지를 않아서 가까운 헬싱키역의 VR(핀란드 철도청) 서비스센터로 직접 찾아갔다. 핀란드 직원분을 붙잡고 한참을 물은 뒤 알게 된 정보. 호텔은 비즈니스나 스위트만 아니면 될 것이고, 기존 티켓은 취소하지 말고 새 티켓을 구매 후 청구하면 된다는 것.


좋아. 오히려 잘 되었어. 안 그래도 비싼 헬싱키 호텔에 가성비 숙소만 갔었는데, 이참에 한번 호텔에 가보는 거야. 스탠다드는 다 될 것이라 했으니 일단 시티 중심에 위치한 호텔을 물색했다. 1월이 딱히 핀란드 여행 성수기는 아니라 당일임에도 룸은 꽤 많았고, 우리는 어쩐지 신나 있었다. 스탠다드 중에서도 가장 좋은 브랜드에 가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음흉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쩐지 양심이 두근거려서 합리적인 가격의 호텔을 예약했다. 헬싱키의 래디슨블루 플라자 호텔. 후


핀란드 헬싱키, 래디슨블루


픽업이 몇 시간 늦어지겠다고 렌터카 업체에 미리 말해놓고, 따뜻하고 넓은 호텔룸에서 몸을 쭉 뉘었다. 다음 날의 8시간 기차가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또 기대가 되더라. 야간열차를 타고 로바니에미로 가서 무사히 렌터카 픽업을 하겠다는 본래의 계획이 틀어지자 우리는 아늑한 무료 호텔 룸에서 쉴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분명 내일 8시간의 기차에서도 어떤 기분 좋은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다. 


사는 것도 그렇듯, 계획대로 무탈히 진행되는 여행도 거의 없다. 원래 계획은 틀어지라고 있는 것이니. 그리고 오히려 그럴 때 더 재미있는 것이 굴러오기도,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를 만나기도 한다. 항상 그랬다. 촘촘히 짜놓은 일이 틀어졌다고 으르렁거렸던 20대의 어린 나. 다른 방향에 열려있는 또 다른 문을 볼 생각도 안 해서 스스로를 괴롭혔던 그때. 이것이 최선이라며 만들어놓은 플랜 A만 덜렁 들고 있으면 열에 일곱은 꼭 변수가 생겼다. 그러고는 마치 누군가 '너의 식견은 좁아'라고 말해주듯 어디선가 더 좋은 플랜이 나타났고, 보다 더 흥미로운 방향으로 갈 수 있었다.


언제나 다른 길은 있다는 것을 알아버린 지금. 나는 오히려 계획이 틀어지는 것을 반기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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