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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롬 Jan 23. 2024

겨울 북유럽 기차에서의 8시간

원래 타려던 야간열차 화장실이 고장 나는 바람에 하루 더 머물게 된 헬싱키. 핀란드 철도청이 지원해 준다는 호텔은 공짜여서 그랬나, 더 꿀잠을 잤다. 그러고는 헬싱키역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헬싱키에서 로바니에미까지는 기차를 타고 가기는 하나, 침대에 몸을 편히 뉘일 수 있는 야간열차와는 달리 KTX처럼 앉아서 가야 한다. 그것도 8시간을 내리. 생각만 해도 몸이 찌뿌둥해지는 터라 열차에 오르기 전부터 괜히 어깨를 주물럭거렸다. 



우리는 열차에서의 시간을 생산적으로 쓰자 했다. 대부분은 노트북으로 일과 공부를 하면서. 그래서 일반석이 아닌 조금 더 집중할 수 있는 EKSTRA, 일명 콰이어트 존의 좌석을 예약했는데, 두당 20유로 정도의 추가금이 있었지만 이점이 제법 많았다. 이코노미석보다는 여유로운 레그룸, 커피와 차 종류 무제한 제공, 대화도 소곤소곤해야 하는 조용한 환경. 쾌적한 장거리 이동에 필요한 조건이 모두 갖춰져 있는 터라 평일 오전에도 콰이어트 존은 만석이었다.



2024.1. 핀란드 인터시티 기차에서



기차 안, 핀란드의 설경


과연 겨울의 북유럽이다. 출발할 때부터 시작된 설경은 끝도 모르고 이어졌다. 헬싱키는 그나마 눈이 다 녹아내린 바닥도 간혹 보였는데, 북극권으로 갈수록 온통 흰색이었다.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라 쉬이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낮의 여행할 시간을 이동에 할애하는 대신 생산적인 일을 하자며 출발 전부터 노트북을 켜 놓았지만, 결국 내내 창문 밖을 보고 사진 찍기에 바쁠 정도로. 옆에서 남편은 피곤했는지 책을 조금 보다가 잠들었는데, 입을 헤-벌리고 자기에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나중에 그가 깨어났을 때 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 사진들을 보여줬더니 남편은 하! 하며 어쩐지 복수를 하겠다는 새침한 표정을 짓더라. 허허.



헬싱키에서 출발한 지 3시간쯤 되었을까. 글도 하나 썼고, 점점 햇볕이 강해져 눈이 부신 통에 식당칸으로 내려갔다. 역시 기차여행의 로망은 식당칸. 그게 무엇이든 새로운 것에는 일단 들뜨고 보는 나와 남편은 메뉴를 꼼꼼히 봤다. 핀란드 기차의 식당칸에서는 대체 뭘 팔까. 사실 메뉴 자체는 그리 특별한 것이 없었다. 북유럽이라면 얼마든 볼 수 있는 미트볼이나 연어샐러드, 간단한 파스타와 리조또 등. 거창한 것을 먹었다간 남은 4시간 동안 계속 속이 부대낄 것 같아 심플하게 샌드위치만 샀다. 물론 가격은 심플하지 않았다. 웬만하면 맛있는 핀란드의 샌드위치를 먹으며 2층의 콰이어트 존과는 또 다른, 1층 그곳의 조금 낮은 풍경을 구경했다.  



점심때인데도 한산했던 식당칸. 거기엔 우리 부부 말고 한 분이 더 있었다. 미니 레드와인을 마시며 아이패드로 무언가를 보시던 여성 분. 낮술을 즐긴다는 것에 동질감을 느껴서일까, 나는 그분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봤던 것 같다. 모험가, 여행자, 디지털 노마드 등의 형태로 평생 살고 싶다는 꿈을 가졌던 고등학생 때부터 그리던, 딱 내가 상상했던 모습이었다. 어떤 낯선 나라의 기차 안에서 와인을 마시는 그런 모습. 막연한 상상의 이미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혼자가 아닌 옆에 귀여운 남편이 있다는 것 정도랄까.






다시 좌석에 돌아와서는 잠깐 졸았다. 얼마간 자고 일어나니 남편이 킬킬대며 내 사진을 보여줬다. 입 벌리고 자는 나의 사진. 오전의 복수였다. 사실 그간 남편이 찍어온 내 엽사들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어서 오히려 좋았지만, 으르렁거리는 와이프의 반응을 보고 싶어 할 남편이라 실컷 그의 볼을 잡아당기며 그르렁거렸다. 열차는 언제부턴가 조금씩 지연되어서 총 25분쯤 늦게 도착할 것이라 했다. 글 쓸 시간이 많아졌으니 역시 오히려 좋아. 여행지의 호텔 조식에서 마시는 커피에 어떤 희열이 있듯, 달리는 기차 안에서 제공하는 보급형 커피를 마시며 에어팟을 끼고 글을 쓰는 것. 주변은 조용한데 괜히 마음이 시끄러워질 만큼 상당한 희열이었다. 



로바니에미로 가는 이 기차의 8시간 동안 나는, 안 그래도 많은 버킷리스트 목록을 기어코 더 늘리고야 말았다. 이름도 겨울을 닮은 나라 핀란드의 기차에, 끝없는 설경을 보자니 하고 싶은 일이 또 쌓여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죽이 되든 뭣이 되든 간에 일단 가고 싶은 방향으로 멱살 잡고 가다 보면 원하는 대부분의 일을 할 수 있으리라. 반은 장난으로 적었던 10대, 20대의 내 버킷리스트들이 거진 다 이루어진 지금은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화장실 고장으로 인해 타지 못했던 야간열차의 안이었다면, 늦은 시간도 시간이지만 침대가 있어 자기 바빴을 거였다. 생경한 풍경에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시간, 로바니에미행 기차. 역시, 예상치 못한 변수는 이렇게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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