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화와 바로 이어지는 글,
하루 종일 그저 즐겁게만 글을 쓰던 나는 언젠가부터 모니터를 보며 한숨만 푹푹 쉬었다. 그에 남편은 "너무 무리해서 그래. 쉬어!"라고 했으나, 내가 볼 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답은 아니었다. 나는 원래도 잘 쉬지 못하는 인간. 가만히 누워있거나 앉아있거나 하지 못하는 인간. 항상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어야 하는, 그런 극강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인간이니까.
그렇게 쉬는 시간, 쉬는 날 없이 내리 글을 쓰는데, 점점 불안해졌다. 빨리 뭘 이뤄내야 한다는 셀프 성취압박감에 기인한 감정이었다. 제출하면 끝인, 내가 더 이상 뭘 어찌할 수 없는 공모전 '결과'에 전전긍긍했고, 나의 불안은 스스로 몸집을 키워만 갔다. 그러는 중에도 나는 쉬지 못했다. 쉬기를 거부하고, 계속 쓰고, 보이지 않는 결과와 성취에 몸이 달아 다리를 달달 떨고.
무언가에 간절한 이상, 조급함과 불안감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한가? 싶었다. '고통은 당연한 것'이라 하며 웬만한 건 그냥 목 뒤로 꿀꺽 씹어 삼키는 나조차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 이제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내내 공모전 발표 언제 나나, 언제 나나 탄식을 뱉으며 이미 끝난 싸움에 매달리는 이 무용한 짓거리들을 끝낼 수 있게, 그래서 내 노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결과와 성취에 대한 압박이 더 이상 나를 갉아먹지 않게.
마음을 편히 가지고, 조금이라도 쉬라는 뜻에서 남편이 제안한 명상, 요가, 정신수련 등등은 내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확실했다. 그러니 나는 내게 맞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발견했다. 나와 딱 맞는, 내 성격을 죽이지 않고 외려 이용할 수 있는 근사한 해결책을. 막 머리를 쥐어뜯으며 억지로 찾아냈다기보다, 그냥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아무래도 완전히 새로운, 신박한, 창의적인 방법이 아니라 늘 내 곁을 맴돌던 것이라 그럴 테다. 숨어 있다가 나 자신을 살리기 위한 본능에게 걸려 수면 위로 끌어올려졌달까.
그것은 바로,
끝난 세계의 문을 닫고,
얼른 다음 세계를 사랑하기
원래 나는, 소설이든 시나리오든 하나를 끝내고 나면 그다음 날부터 바로 다음 원고를 쓰기 시작했지만, 어제의 것에 완전히 미련을 털어내지는 못했다. 그래서 새 이야기를 쓰고 있음에도 계속 전 작품을 기웃거렸다. 읽기 좋게 PDF로 변환한 이전 원고 파일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고 거슬리는 부분은 기어코 수정하고 퇴고하고 그랬다.
아. 좀 수정하면 더 괜찮지 않을까.
그 장면을 빼고, 다른 에피소드를 넣어야 할까, 역시.
아니면 차라리, 조금 더 판타지 요소를 추가해서 여긴 이렇게….
한마디로, 이미 결말을 낸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질척질척한 미련은 어느새 집착이 되어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이건 되지 않을까, 이건 당선되지 않을까. 그 작품을 제출한 공모전 홈페이지를 수시로 들락거리며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더 아까운 감정을 낭비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짧으면 보름, 길면 두 달까지 매일 그리고 애지중지하던 캐릭터들, 세계관인데. 완결을 쳤다고 해서 단숨에 홱 돌아서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계속 생각나고 그러는 거지. 평범한 정도의 온정을 가진 보편적인 인간이라면 마땅히 그럴 수밖에. 내가 만든 세계에 정을 떼고 마음을 떼는 일, 그것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쉽지 않은 일을 해내야 했다. 그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 지난한 어둠을 지나기 위한 유일한 숨구멍이었고.
A라는 작품을 막 끝냈다 치자. 그런데 계속 A를 붙잡고 있는다면, 장면적인 예로 A의 주인공인 김영수(가명)를 붙잡고 "흐으, 영수야!" 이러고 징징대고 있으면 계속 그 작품에 집착을 할 수밖에 없다. 나는 늘 그랬다. 어차피 엔딩 장면까지 야무지게 써 놓은 터라 수정해도 큰 의미는 없는데, 그럼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일단 완결까지 다 만들어놓으면 공모전이든 어디든 내놓고, 기다려야 한다. 그 기다릴 때 영수야! 이러고 계속 끝낸 원고의 바짓가랑이를 질질 붙잡고 있는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다음 것을 해야 한다. 다음 작품을 기획하고, 시작하고, 새 작품 B의 주인공인 박영희(가명)을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내 마음을 지킬 수 있고, 이 길고 지난한 과정을 버틸 수 있다.
흥.
넌 이미 내 손을 떠났어.
끝, 끝!
나 진짜 이제 너 안 볼 거야.
나한테 말도 걸지 마. 아주 그냥.
새침하게 굴어야 했다. 짧으면 보름, 길면 두 달까지 매일 예뻐하던 주인공과 세계관을 팩 외면하려니 입이 썼지만, 그래도 매몰차야 했다. 그래야 내가 산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한다면 해. 하겠다고 하면 해. 그러니 이미 끝난 사랑을 끊어내는 것 따위, 우직하게 마음먹으면 불가능하진 않다. 하나, 둘, 셋, 넷… 끝내고 팩, 완결내고 팩, 팩, 팩, 팩. 이걸 반복하다 보니 익숙해져서 어느새 '완결 후 정 떼기'는 당연한 과정 중 하나가 되어있었다.
이 방법의 장점은 아주 명확했다. 우선 마음이 편해졌다. 공모전에 제출한 작품에 마음이 뜨니, 자연스럽게 그 공모전에서도 마음이 떴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그 원고는 좀 그래. 뭔가 이상해. 오글거리는 장면이 과연 한 두 개가 아니야. 그러니 안 되겠지. 될 리가 없어! 이미 떠난 배다. 결말까지 냈으니 대대적인 수정은 무리고, 다른 걸 하자. 얼른 다음 것을 만들어서, 다음 공모전에 제출하자.'
생각의 흐름은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그래서 난 더 이상 공모전 홈페이지를 들여다보지도, 메일함을 수시로 들락거리지도 않게 되었다. 어차피 떨어질 텐데? 뭐 하러 그래. 억지로라도 작품에서 손을 떼어 버리니 마음이 몹시 가벼웠다. 매우 건강하고, 건전한 모양새였다.
그러나 이에 따라오는 단점 역시 너무도 분명했다. 개중에서도 가장 큰 건, 퇴고하려고 해도 이제 처음과 같은 그 맛, 의지, 동기 등등이 안 난다는 점. '넌 이미 나를 떠났어.'를 넘어 '넌 이제 내꺼 아님'이라는 극단적인 생각으로 치닫기도 하니 이 원고를 작성할 때의 애틋함이나 애정이 조금 줄어드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 얻은 득이 실보다 훨씬 컸다. 저울질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실'이 미미했던지라, 아 이건 내게 꼭 맞는 해결책이었다. 게다가 딱히 단점이 단점이라 할 수는 없는 게, 일부러 떼어냈던 작품에 대한 '정'이라는 건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왔다.
제13회 교보 스토리 대상 최종심에 오른 작품을 예로 들어보자.
나는 아예 그것에서 손과 눈과 모든 마음을 뗀 상태였다. '넌 이제 내 손을 떠났다' 과정을 거치며 후루룩 원고를 돌아본 결과, '아, 이건 영 가망이 없겠는걸?'이라는 판단까지 내린 작품이었다.
그렇게 아예 싹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다른 세계관과 열렬한 사랑에 빠져있을 때쯤, 갑자기 연락이 왔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 나는 최종심 선정 메일을 받고 n개월 만에 처음으로 그 작품의 최종 파일을 열어보았다.
"음… 역시 나쁘지 않군."
그리고 내 마음은 파전 뒤집듯이 단숨에 후루룩 뒤집혔다. 아무래도 이건 영 가망이 없겠다 싶었던 부정적인 피드백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래. 그래 맞아. 사실 이건 꽤나 괜찮지…."
대단한 업계 전문가분들에 의해 채택이 된 작품에 대한 사랑이 다시금 퐁퐁 피어올랐다. 그날부터 그 파일은 나의 바탕화면 중앙으로 빼내어졌고, 여유가 날 때마다 조금씩 '수정'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막 머리를 쥐 뜯으며 '왜 안 되지?' 하는 마음은 당연히 없었다. 이 작품에 대해 한번 훅 꺼졌던 애정이 다시 차오르긴 했지만, 나는 이미 다른 작품의 인물들과 세계에 푹 빠진 상태라 그것에는 겨우 반절 정도의 마음만을 내어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조급함에 까득까득 손톱을 깨물거나 하지 않으며 제법 담백한 태도로 퇴고를 할 수 있었다. 어쩌면 모든 작품을 이렇게 대해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매우 건전하고, 건강했다.
세상일이 참 그런 듯하다. 온 힘을 다해 신경 쓰고 집착하면 멀어지고, 신경 안 쓰고 휙 고개 돌리고 있으면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찾아오는.
어제까지 내 온몸을 불살라 사랑했던 세계에 마음의 문을 닫는 과정을 반복하며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지금 이게, 내 전부가 되면 안 돼.
그럼 망해. 되게 집착하거든.
공 들이는 무언가를 사랑하는 건 좋아. 당연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그렇지 않으면 애초에 완결을 못 내. 애정이 부족해서. 그러니 사랑은 해야 해. 그런데, 그게 안 될 확률이 80프로 이상이야. 아무리 붙잡고 있어도 안 될 건 안 되고 될 건 돼. 근데 내가 그 확률을 모르잖아? 뭐가 될는지 아닌지. 신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하나만 냅다 파지 말고, 다른 거를 해. 하나 끝내고 다음 거 또 다음 거.
결과와 성취에 대한 집착, 나는 그 무용한 짓을 나만의 방법으로 해결했다. 아직도 완전히 마음을 비우지 못할 때가 많지만 그래도 1년 넘게 글쓰기에 몰두하는 지금, 초반보다 아주, 매우, 몹시 나아졌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의 8할은 이 방법 덕분이었다.
그래서,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같은 이 과정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방법,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은 다음과 같다.
한숨의 원인: 빨리 뭔가를 이뤄내야 한다는 조급증
내게 안 맞는 해결책: 쉬기, 명상, 요가, 마음 수련 등등
내게 맞는 해결책: 끝난 작품에 문을 닫고, 얼른 새로운 세계를 사랑하기
이게 나를 살릴 것이고, 버티게 해 줄 것이고, 어둠 속에 잡아먹히게 두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끝내 목표를 포기하지 않게 해 줄 것이다. 그렇다고 믿는다.
언젠가는 빛나는 기회가 올 거야.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싸워. 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