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27] 현명한 사람은 함부로 불행해지지 않는다.
D-227. Sentence
현명한 사람은 함부로 불행해지지 않는다.
느낌의 시작
며칠째 카페테이블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다. 몇 년 전부터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진행해온 연구 결과를 이제는 온전히 내 이름으로 남겨야 할 때가 되었다. 올해 연구비 지원사업에서는 탈락해 마음이 조금 쓰라렸지만, 아직 제출하지 못한 결과물 세 편은 어떻게든 완성하고 싶었다. 올 상반기 제출한 논문 한 편은 ‘학회심사 부적합’이라는 판정을 받았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새로운 학회를 찾아 원고를 갈아엎듯이 고쳐 보냈다. 그리고 어제, 심사 결과가 도착했다. ‘수정 후 게재.’ 심사 결과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또 부적합 판정을 받을까 봐, 게재 불가 통보를 받을까 봐 내심 초조했는데, 공을 들인 보람이 있구나 싶어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렇게 오늘도 모니터를 켜고, 둘째를 등교시킨 후 자리에 앉았다. 심사위원 세 명의 평가서를 정리해 옆에 두고, 한 문장 한 문장 뜯어가며 수정 중이다. 어느새 세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아직도 첫 번째 심사평을 다 반영하지 못했다. 자잘하게는 맞춤법과 띄어쓰기, 문장 길이와 중복 표현, 표 번호 수정, 해외 학자 표기법 교정 같은 것들이 있고, 크게는 분석 기준의 타당성을 보완하고 연구 결과를 설득력 있게 다시 쓰는 작업도 남아 있다.
이렇게 붙들고 앉아 있노라면 늘 드는 생각. 학술논문이라는 게 본래 이렇게나 지난한 것이었나. 고작 10페이지 남짓한 결과물이지만,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고민이 숨어 있는지를 매번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한 권의 학회지를 넘기며 눈에 들어오는 그 짧은 논문 한 편이 사실은 누군가의 수많은 새벽과 피로와 무수한 수정을 거쳐 만들어진 결과라는 걸, 그 과정을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마음의 흐름
논문을 붙잡고 하루를 보내다 보니, 문득 논문과 인생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결혼도,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도 모두 누구나 다 하는 일 같아 보이지만, 막상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전혀 다르다. 모두가 쉽게 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들 울고 웃고 상처받고 애쓰며 그 길을 간다.
결혼을 준비하면서도 생각보다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했고, 의견이 맞지 않아 서럽게 울고 화해하며 서로를 설득하길 수없이 반복했다. 아이를 갖는 일도 순탄치 않았다. 첫째를 낳고, 그 뒤에는 유산을 겪었고, 6년이 지나서야 둘째를 품을 수 있었다. 첫째가 태어나고 100일쯤 되었을 때, 나는 박사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첫째를 시댁에 맡기고 매일 아침 육아용품이 가득 든 짐을 들고 나와 시댁 근처 스타벅스에서 하루 종일 논문을 쓰고, 저녁이면 시아버지의 식사를 챙기고 첫째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을 반년 가까이 반복했다. 그 시간을 지나 지금은 사춘기에 접어든 첫째의 거친 시선을 받아내며 매일 전쟁 같은 하루를 살아간다.
오늘 아침, 첫째의 반항적인 눈빛이 유난히 버거웠다. 어떻게든 엄마에게만큼은 굴복하지 않겠다는 그 눈빛과 태도에 이 집이 회칠한 무덤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럴수록 다짐한다. 인생에는 쉬운 일이 없다는 것을. 세상에 정말로 ‘별것 아닌’ 일은 없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함부로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왜 나만 이렇게 사는지에 대한 자기연민 속으로 빠지지 않으려 한다.
내 논문의 허술한 부분을 하나하나 고쳐 가듯이, 내 삶도 그렇게 부딪히고 메꾸고 다듬어 가야 한다. 그것이 내가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고, 나 자신과 내 삶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책임이다. 오늘도 그러면 된다. 단순하고 간단하게. 그게 전부다. 오늘 할 일을 마음에 저장하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
내 안의 한 줄
“삶은 끊임없이 수정하며 완성해가는 글이다.”
** 매일의 감정이, 나를 설명할 언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