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05] 시작은 아무 날에나
D-405. Sentence
시작은 아무 날에나
문장보다 이미지에 더 끌렸다는 말이 더 맞겠다. 꾸민 듯 꾸미지 않은 베이직한 스타일, 과하지 않은 실버 반지, 포인트가 되어주는 레드 시계줄. 아무 곳에나 앉아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펼칠 수 있는 여유. 에어팟이 아닌 유선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 여자. 그 음악은 아마 힙합이 아닐 것 같고, 유행도 아닐 것 같고, 그저 자기 취향일 것만 같은 멋스러운 사람.
어느 것도 과하지 않고, 어떤 것도 조급해 보이지 않는 자유로움. 그 세련됨이 그 어떤 명품 스타일링보다 빛나 보였다. 어쩌면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바로, 나만의 여유로움. 오늘 아침도 둘째를 늘봄수업에 데려다주고, 첫째가 학원 가기 전까지 둘째 하교와 돌봄을 부탁했다. 혼자 일할 수 있는 시간은 단 2시간. 정확히 정해져있는 단 몇 시간은 언제나 나를 조급하게 만든다.
새로 생긴 동네 카페에서 새로움을 만끽하며 일해볼까 생각하다가, 결국 가장 가까운 카페로 향했다. 선택의 여유조차 사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라떼를 주문하고 창가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꺼냈다. 어제저녁 급하게 요청받은 제안서를 오늘까지 전달해야 했다. 팀원들과 통화를 반복하며 형식을 맞추고, 내용을 확인하고, 파일을 정리했다. 그 와중에 이번 학기 새롭게 나가게 될 학교에서 신규 임용 관련 자료를 오전까지 보내달라는 전화도 걸려왔다.
주어진 2시간은 숨 돌릴 틈 없이 사라졌다. 집에 돌아오니 아침을 먹지 못한 둘째가 배고프다며 아우성쳤다. 나는 또 정신없이 점심을 준비했다. 오늘도 그랬다. 마음도 급하고, 시간도 급하고, 모든 것이 조급했다. 어떤 일을 하고 있든 그다음에 해야 할 일들을 동시에 생각해야 했다. 할 일이 없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방학이 되면 여유가 생길 줄 알았다. 성적 처리를 마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온라인 강의 촬영을 끝내면, 연구재단 제안서를 제출하면, 설 연휴가 지나면. 그러나 늘 다음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네버엔딩이었다. 몸은 바쁘고 역할은 많은데, 마음은 여유롭고 싶다는 이 모순. 욕심일까. 아니면 내가 아직 여유를 ‘조건’으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까.
오늘 문득 깨달았다. 여유는 시간이 남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선택해서 만들어내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남들이 보기엔 전혀 여유로워 보이지 않는 2시간일지라도, 내가 ‘나의 시간’이라 이름 붙이면 그것은 여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정했다. 현실과의 괴리를 탓하기보다, 지금 가능한 방식으로 나만의 여유를 찾기로.
내 안의 한 줄
여유는 조건이 아니라 태도다.
매일의 감정이, 나를 설명할 언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