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09] 수많은 비바람들을 삶의 디폴트로 놓으십시오.
D-409. Sentence
수많은 비바람들을 삶의 디폴트로 놓으십시오.
다 힘들다. 누구나 다 힘들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사람은 늘 자기 몫의 고통이 가장 크다고 느낀다. 머리로는 안다. 세상에 쉬운 인생은 없다는 사실을,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무게를 지고 산다는 것을. 그런데 막상 내 상황 안에 들어오면 생각은 달라진다. 왜 이렇게까지 바쁜지, 왜 이렇게까지 복잡한지, 왜 나만 유독 벅찬지 묻고 싶어진다. 나만 힘들다는 생각만큼 어리석은 생각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또 그 구렁텅이에 빠져든다. 그래서 요즘 나는 방향을 조금 바꿔보기로 했다. 비바람을 예외로 두지 말고 기본값으로 두자고. 고요하고 평온한 날을 기준으로 삼지 말고, 흔들리고 젖고 엉키는 날들을 디폴트로 두자고.
지난주에 이어 주일 저녁, 또다시 삼척으로 향했다. 월요일 아침부터 기관 담당자들과 회의를 하고, 협업할 업체들과 미팅을 진행하고, 현장을 돌아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이 되어서야 서울로 출발했다. 집에 도착하니 자정이 가까웠다. 분명 하루였는데, 체감은 사흘이었다. 쉼 없이 말하고, 운전하고, 설명하고, 설득하고, 정리하며 보낸 하루는 꽉 차다 못해 넘쳐 있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오랜만에 오래된 친구와 통화를 했다. “요즘 그렇게 바빠?”라는 가벼운 질문에 잠시 말문이 멈췄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하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늘 책상 앞에 앉아 논문을 쓰고, 연구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내가 요즘은 지방을 옆집 드나들듯 오가며 장소를 헌팅하고, 리트릿 동선을 짜고, 지역 사람들을 만나 구조를 설계하고 있다. 이건 과연 어떤 전환일까. 우연일까, 아니면 오래전부터 어딘가로 향하고 있던 흐름의 결과일까. 지난주에는 현재 진행 중인 시범사업과 별도로 또 다른 사업 제안 요청을 받았다. 세 개의 기업으로부터 제안서를 받아 가장 좋은 안을 선택하겠다는 말과 함께, 우선 아이디어 중심의 제안서를 요청받았다. 가늠할 수 있을 만큼만 정리해 보내드렸고, 오늘 오전에는 4월 리트릿 시범사업 신청을 위한 구글폼을 만들며 낯선 문항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그 사이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 제안이 가장 마음에 든다며, 더 구체적이고 상세한 제안서를 요청한다는 연락이었다.
올해도 예측불가다. 아니, 어쩌면 인생은 원래 예측불가였는데 내가 잠시 안정적인 구조 안에 있었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꽃길을 기대하는 상상은 애초에 하지 않기로 했다. 꽃길은 드물 것이다. 대부분은 가시밭일 것이고, 햇빛이 쨍쨍한 날보다 비바람을 고스란히 맞아야 하는 날이 더 많을 것이다. 웃는 날보다 얼굴이 굳는 날이, 조용히 참고 넘어가는 날이, 숨어서 울거나 놓지 못해 통곡해야 하는 날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 모든 날들을 기본값으로 두자. “왜 이렇게 힘들지”라고 묻기보다 “아, 오늘도 보통날이네”라고 받아들이자.
어제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팀원들에게 말했다. 이번 4월 시범사업이 망하든 성공하든, 결과와 상관없이 기대가 된다고. 이상하게도 그 말은 허세도, 자기 위로도 아니었다. 진짜였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걸 안다. 잘해보자고 다짐하기보다 그냥 해보자고 말하는 쪽이 지금의 나에게 더 솔직하다. 완벽한 준비보다 움직임이 먼저이고, 결과보다 경험이 먼저다. 열리는 대로 가볼 생각이다. 비바람이 불어도, 길이 예상과 달라도, 일단 가보는 해로 정했으니까.
내 안의 한 줄
비바람을 기본값으로 두면, 두려움은 작아진다.
매일의 감정이, 나를 설명할 언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