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닳지 않는 사람

[D-424] 쉽게 닳지 않는 사람

by Mooon

D-424. Sentence

쉽게 닳지 않는 사람


IMG_5106.jpg @seoulmuseum

한참을 쉼 없이 달리다가 문득 멈칫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어디선가 계속 나를 깎아 쓰고 있는 느낌이 들 때다. 채워지는 건 없는데, 내 안에 있던 것들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는 기분. 어제는 딱 그런 하루였다.


아침에 가족과 같은 언니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례식장은 제주도였고, 나는 수업이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서울에 도착하면 밤 9시, 다음 날 아침에도 수업이 잡혀 있는 상황에서 갈 수도, 안 갈 수도 없는 애매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몸은 움직이고 있었지만 마음은 계속 한쪽에 붙잡혀 있는 상태였다.


결국 수업 직전까지도 마음만 분주했고, 준비도 집중도 제대로 되지 않은 채 강의실에 들어갔다. 학생들 앞에서 4시간 동안 계속 무언가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내가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 확신이 들지 않았다. 큰 문제는 없었지만, 계속 어딘가 삐걱거리고 있다는 감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고 바로 원주역으로 향했다. 저녁을 먹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서울로 가는 KTX를 기다리며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로컬사업과 관련된 메일이 와 있었고 팀장님은 급히 통화를 원하셨다. 밤 9시 30분 통화를 약속하고 기차에 올랐다. 그 사이 둘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제 오냐고, 엄마 얼굴 보고 자고 싶다고. 9시 30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라 말했지만 결국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대신 전화를 걸어 굿나잇 기도를 해주었다. 전화기 너머로 씻고 누워 있을 아이의 모습이 그려졌다. 오늘도 지켜주셔서 감사하다고, 단잠을 허락해달라고 기도해주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더 마음이 묘해졌다.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카페로 향했다. 늦게까지 문을 여는 베이커리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팀장님과 통화를 시작했다. 분위기가 나쁜 것도 아니었고, 평범한 업무 이야기였지만 이상하게도 통화를 하는 내내 내가 조금씩 닳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을 할수록, 듣고 있을수록 내 안의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카페 마감시간이 가까워지자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짐을 챙기며 밖으로 나왔다. 밤길을 걸으면서도 통화는 계속 이어졌다. 도대체 이 느낌은 뭘까. 특별히 힘든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계속 빠져나가기만 하는 기분이 드는 걸까.


그래서 생각했다. 나는 쉽게 닳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사람 관계 속에서도, 일 속에서도, 어떤 상황 속에서도 쉽게 소모되지 않는 사람. 외부 자극에 계속 깎여 나가기보다 내 안에서 버티는 힘이 있는 사람. 처음엔 강렬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날수록 신뢰가 쌓이고, 오래 볼수록 깊어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중요한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함께하지 못했다는 미안함, 학생들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는 아쉬움, 엄마로서 내 자리를 충분히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부족함. 이런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왔지만, 그 감정들 때문에 나 자신까지 다 소진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분명 또 감당해낼 것이고, 결국 지켜낼 사람이니까.


오늘수업을 마친 후 집 근처에 도착해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독일인이 운영한다는 베이커리 카페에 들어갔다. 시그니처라는 시나몬롤과 아이스커피를 앞에 두고, 다시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다시 몰입했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오늘도 내가 살아낸 보통의 하루니까 말이다.



내 안의 한 줄

쉽게 닳지 않는다는 건, 나를 잃지 않는 것이다.


매일의 감정이 나를 설명할 언어가 된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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