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과 관리들이 제주를 바라본 관점
제주로 이주하면서 제주도에 대한 지리 자료들을 찾고 공부하고 있다. 그러면서 가장 먼저 만난 자료가 『탐라순력도』이다. 『탐라순력도』 속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제주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다양한 정보들이 포함되어 있다. 앞으로 여러 자료를 수집해 지리적 관점에서 제주를 바라보는 작업을 꾸준히 해 나갈 예정이다.
| 가장 오래된 제주지도_탐라순력도의 한라장촉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제주지도는 『탐라순력도』속에 포함되어 있는 한라장촉이다. 『탐라순력도』는 이형상이 1702년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로 부임해 제주도 내의 각 고을과 행사들을 돌아보는(순력하는) 장면을 제주의 화공(畵工) 김남길에게 그리게 하고 오씨 노인에게 간략한 설명을 쓰게 해 만든 총 43장의 화첩(그림책)이다. 한라장촉에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관아, 목장, 오름, 마을, 하천, 봉수, 군사 시설 등을 표시되어 있다.
| 탐라순력도를 잇는 제주지도_탐라지도병서
『탐라지도병서』는 그로부터 7년 뒤 1909년 제주목사 이규성이 제작한 지도이다. 상단과 하단에는 각 고을의 연혁,도리道里),인구,군사,재정 등과 관련된 기록과 명승고적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지도에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오름, 촌락, 포구, 목장, 과수원, 군사 시설 등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이 두 지도의 특이한 점은 무엇일까? 두 지도는 18세기 특징인 24방위가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에 흔히 사용하던 방위 배치 방식과는 달리 지도의 위쪽을 남쪽으로 배치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동서남북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동쪽에 있는 우도가 왼쪽에 배치된 걸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지도는 방위가 특별히 표시되지 않은 경우 위쪽이 북이고, 아래쪽이 남쪽이다.조선시대의 전국 지도들은 대부분 이런 지도 제작 방식들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유독 제주를 단독으로 나타낸 많은 지도의 경우 이런 규칙이 깨진다. 두 지도 시작으로 그 이후에 제작된 많은 제주 지도들이 이런 방식을 따르고 있다.
| 두 지도는 왜 제주도를 거꾸로 그렸을까?
그렇다면 제주도를 왜 이런 방식으로 그렸을까? 자세한 이유가 나와 있지 않으니 상상해 볼 수밖에 없다. 지도는 철저하게 육지에서 제주도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그려져 있다. 두 지도는 조선 왕실에서 파견한 관리에 의해 제작된 지도이다. 제주도를 바라보는 조선관리들과 왕실의 시각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본토와는 거리가 멀어 당시로서는 쉽게 갈 수 없는 제주도는 군사적 요충지이자, 유명한 유배지였다. 또한 말(제주마)과 감귤 등 당시에는 다른 곳에서 생산할 수 없는 진귀한 특산물을 왕실에 진상해야 하는 곳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주도와 제주민들은 관리들과 왕실의 특별 관리 대상이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제주(濟州)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유리(流離)하여 육지의 고을에 옮겨 사는 관계로 세 고을의 군액(軍額)이 감소하자, 비국이 도민(島民)의 출입을 엄금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고 한다. 결국 인조 7년인 1629년 제주에 출륙금지령을 내렸고, 제주 사람들은 200년 가까이 섬 안에 갇혀 폐쇄된 생활을 했다. 왕실에 진상할 진귀한 특산품을 생산해야만 했고, 외적방어를 위해 군대를 유지할 세금이 필요했기에 제주민들은 이곳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제주는 육지에 있는 왕실의 관점에서는 특별한 관리가 필요한 곳이었고, 관리들에겐 왕실에 특별한 진상품을 생산해 내는 곳으로서만 인식된 건 아니었을까? 제주와 제주민에 대한 이같은 인식이 관리들이 제작한 지도에 고스란히 반영되었고, 후대에 관습으로 굳어져 이어온 것은 아니었을까?
* 참고자료
http://www.klca.or.kr/KLCADownload/eBook/P6649.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