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 중년을 다룬 시사프로그램을 보았다. 은둔하던 청년들이 이젠 장년이 된 사회문제를 조명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해졌다. 생각만큼 심층적으로 문제를 다루진 못했지만, 현상을 보여주고 화두를 던지는 것만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어 보였다.
방송을 보면서 한 교수의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한국은 고립·은둔이 심각해질 수 있는 최적의 나라라고. 경쟁적인 사회 분위기와 정형화된 삶의 시간표. 끊임없이 뭔가를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능력주의는 한국 사회에 은둔 문제를 불러왔다고 진단했다.
45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경쟁적인 사회에서 일단 뛰어내렸지만, 요즘도 끊임없이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여전히 하루하루를 지배한다. 뛰어내리는 것 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진 않나 보다.
직장을 그만두고 명예퇴직을 하겠다고 통보(?) 했을 때, 엄마는 애써 이렇게 말씀하셨다
“난 걱정 안 한다. 너는 어릴 때부터 한 번도 놀지 않았지. 뭐라도 했으니까.”
이 말이 칭찬인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니 부모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 말이 은근한 압박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방송에 나온 이들과 비슷하게 나 역시 뭐라도 하지 않은 상태가 많이 불안하다.
나는 왜 이 온실을 꼭 지여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고집할까? 왜 온실을 마무리하지 못한다는 열등감이나 패배감을 느낄까?
어릴 때부터 뭔가를 계획할 때 마음이 편해졌다. 계획이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시간이 남아돌 땐 친구들을 불러내 골목에서 구슬치기라도 해야 마음이 편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제대로 견뎌본 기억이 없다. 어쩌면 이 글을 쓰는 이유도 뭔가를 하고 있지 않다는 불안감 때문일지 모른다. 나도 부모님도 그런 시간을 스스로에게 허락하고 마음껏 누려 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이런 고립과 은둔 문제의 해결 방법으로 공동체 문화로의 복귀를 쉽게 대안으로 제시한다. 일면 맞고, 일면은 틀린 것 같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끈끈한 공동체 문화가 오히려 결국 개인(가족)의 비교와 경쟁을 당연시하고, 비교 우위 대상이 되지 못한 이들이 그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공동체를 탈출(내외부로)해 고립과 은둔을 택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엄마 친구 아들(딸)의 전설이 그냥 생긴 말이 아니다.
반대로 경쟁보다는 환대하고 위로하는 공동체가 있다면 어떨까? 그런 곳이 없다면 내가 직접 만들어 내야 하는 건가?
명예퇴직을 한 후 귀촌 대상지로 부모님께서 여전히 포도 농사를 농사짓고 계신 고향이 아니라 누구도 모르는 제주 중산간으로 이주했다. 부모님께서는 섭섭해하셨지만 어릴 때부터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타향에서는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라 칭송받으시던 예수님도 자기 고향에서 ‘목수집 아들’이라고 비웃음 아닌 비웃음을 당하셨다는 성경의 기록으로 보아, 다만 이 문제가 오늘날에 발생한 현상만은 아닌 듯싶다. 예수님은 그런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방송을 다 보고 나니 우리 아이들에게 미안해진다. 부모의 불안은 스펀지처럼 자녀에게 쉽게 전염이 되는 것 같다. 불안을 수시로 선물해 용기를 가지고 실수와 실패할 기회를 주지 않은 아빠가 아니었나 걱정이 된다. 사는 게 참 맘 같지 않다.
다행히 아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불안함이 전혀 없어 보인다. 쉬는 날엔 정말 눈치 보지 않고 잘 쉰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없어 보여 열받을 정도다. 완전 개 부럽다. 이런 모습이 멋있어 보여 결혼을 했던가? 가끔 내가 찍은 발등이 아프기는 하지만 약이 되겠지?
햇살을 향해 아무 생각 없이 쉬는 녀석들이 진정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