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의미다 - 27
‘공부(工夫)’는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이라는 뜻이다. 工(장인 공)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람 모양으로 기술인이나 예술인 등 장인(匠人)의 뜻이고, 夫(지아비 부)는 남편, 사내의 뜻을 나타낸다. 이렇게 한자 工과 夫를 아무리 조합해보아도 배우고 익힌다는 뜻을 찾아보기 어렵다. 대체 어디에서 공부의 뜻이 온 것일까?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중국 무술의 한 종류인 ‘쿵푸(功夫)’라는 한자에서 功(공로 공)자에서 力(힘 력)이 빠져서 工夫가 되었다는 설이다. 무술을 열심히 연마한다는 의미에서 학문을 배우고 익힌다는 뜻으로 변하여 공부란 말로 쓰인 것이 아닌지? 다른 하나는 불교의 ‘주공부(做工夫)’라는 용어에서 왔다는 설이다. 주공부는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불법을 열심히 닦는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 공부란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공부란 것이 풀 수 없는 난제이듯, 쉬운 한자어 工夫가 어디서 왔는지조차 난해하다.
공부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신속하게 답을 찾아내기 위함이 아니고, 전혀 새로운 환경 혹은 다양한 상황에서 창의력을 발휘해 그 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소피아’라 한다. 소피아는 지혜(智慧)라는 뜻으로, 사물에 대한 완전한 인식 또는 최고선에 대한 지식을 이르는 말로 경험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경험을 통해서만 지식이 지혜가 되기 때문이다. 공부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끝없는 상상을 통해 그것을 현실과 연결하는 노력이자 과정이다.
우리는 공부라는 말만 들어도 두꺼운 책과 선생님, 거기에 ‘공부해라’로 대변되는 부모가 떠올라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어릴 때부터 공부는 지겹고 노는 건 즐거운 일로 각인되어 있다. 성인이 되어 회의는 지겹고 회식이 즐거운 이유와 똑같다. 무엇이든 즐기는 자가 최고의 경지라 했는데, 즐겁지 않은 공부가 잘될 수가 없다. 최고의 공부가 되려면, 공부가 놀이가 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사실 공부의 진면목을 깨우치면 공부보다 재미있고 쉬운 일이 없다는 사람도 많다. ‘내 평생 공부가 재미있던 적은 한 번도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지만.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공부에 목숨 걸고 매달리는가? 가장 큰 이유가 ‘신분 상승의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부터 벼슬길에 나가기 위한 과거 공부에 매달리는 이유도 장원급제하면 초고속 신분 상승의 길로 들어선다. 지금도 변치 않았다. 고시에 합격하는 순간 그렇지 않은가. 다음으로 경제적 여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적 여유를 누릴 수 있는 누구나 갖고 싶은 직업은 소수이고 경쟁이 심할 수밖에 없다. 전체 시장에서 나누어지는 파이 조각이 소수로 나누어질수록 크기 때문에 경제적 여유를 누릴 수 있다. 경쟁이 아무리 심해도 정원을 늘리지 않는 의사, 변호사 등의 직업이 대표적이다. 공부가 비교적 쉬운 신분 상승과 경제적 여유의 수단이 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매달리지 않는 게 이상하다.
공부는 지식과 기술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식과 기술을 매일매일 천천히 음미하면서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공부이다. 그런데 우리 교육에서는 이런 깊이 있는 과정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시간에 쫓기게 만들고, 빨리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정답을 찍게 만든다. 정답 찍기를 잘하는 사람이 공부 잘하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학생들은 공부라 하면 시험을 생각하고, 시험에서 정답을 찍는 법을 배우는 것을 공부라 생각한다. 한마디로 공부는 ‘암기와 시험(정답 찍기)’이다. 공부가 있으니 시험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공부의 시작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가를 깨닫는 것이니, 여태껏 배운 것을 점검하고 실력을 평가하는 절차를 모두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답을 찍어 평가하는 시험 방식이 문제라는 것이다. 학교 교육의 가장 큰 잘못은 시험 점수만으로 학생의 능력을 규정하고 속단하는 것이다. 학생, 부모, 교사, 사회 등 모두가 점수라는 숫자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집착하면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사실 공부는 어떤 지식과 기술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하는 것이고, 어떤 지식과 기술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정답 찍기와는 무관하다. 지식은 변화하며 기술도 진보한다. 이런 격변의 시대엔 계속 배워야 한다. 지속적인 업데이트와 융합, 통합이 이루어져 살아 있는 생명체 같은 것이 공부다. 그래서 공부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평생 배우는 학생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공부는 지식과 기술뿐만 아니라 경험을 축적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지식과 기술의 습득이 좁은 의미의 공부라면, 다양한 경험을 축적하는 과정은 넓은 의미의 공부이다. 일반적으로 학생 때는 지식과 기술, 어른이 되면 경험을 쌓아가는 것에 무게를 둔다. 지식과 기술의 습득에는 목숨 걸고 노력하는 데 비해, 경험을 쌓는 데는 소홀히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큰 디딤돌이 지식보다 다양한 경험이고, 점수나 숫자로 측정할 수 없는 경험들이 행복하게 해 준다. 그렇다면 어릴 때부터 경험을 공부하는 문화가 조성되었으면 좋겠다. 여행을 통한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다양한 예술을 보고 들으면서 행복한 경험을 하는 것이 공부를 통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공부는 혼자서 생각하고 질문하며 답을 찾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완전한 자기 것이 될 수 없다. 선생님은 밥을 짓는 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이지, 나의 밥을 대신 먹여주는 사람이 아니다. 내 밥은 내가 먹어야 한다. 독학은 순전히 나를 위해 존재한다. 나를 향하고 나의 질문을 끌어내고 나의 반응을 기다린다. 내 것을 좀 더 확실하게 남겨준다. 혼자 하는 학습은 산만할 수가 없고, 자연히 집중될 수밖에 없다. 몰입을 가능하게 해 준다. 궁금증과 호기심을 통한 생각으로 터득한 지식은 온전한 내 것으로 피와 살이 된다.
부모님이 사용하는 마법의 말 중 하나가 지금 뭘 하고 있든지 간에 ‘공부나 해라.’다. 이 한마디면 자식이 하는 일은 전부 쓸데없는 일이 된다. 그냥 부모라는 권위로 자식을 순식간에 평정해버리는 말이다. 자식을 키운 부모라면 많이 사용했을 것이다. 차라리 부모의 뜻대로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면서 학생의 공부를 방해하는 경우보단 나은가. 또 하나가 ‘공부해서 남 주나?’, ‘나 좋으라고 공부하라 해, 너 좋으라고 공부하라 하지’라는 말이다. 근데 어쩌랴. 지금은 ‘공부해서 남 주자’로 바뀐 것을 아는가? 배워서 남에게 도움을 주는 상생의 공부를 하자는 말이다. 앞으로 공부하는 자녀를 키우는 부모님들은 ‘공부나 해라’, ‘공부해서 남 주나?’란 말 절대 하지 말기를~!
인생을 잘 살려면 평생 공부해야 한다는 것은 진리에 가깝다. 세상이 혼란하고 힘든 것은 사람들이 못 배워서가 아니라 잘못 배워서다. 공부는 무엇을 많이 알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한다. 바른 사람이란, 나만 위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하는 것처럼 남도 위할 줄 아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예의를 몸에 익혀 겸양의 자세를 갖는 것은 기본이다. 알아도 배우는 자세로 대하면, 하나 더 알 수 있는 기회가 생길 수 있다. 너와 내가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공부, 세상과 소통하며 관계 맺는 공부, 자연을 존중하고 상생하는 공부, 이런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공부는 잘하고 못하고보다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떤 공부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목표를 가지고 하는 공부는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 재미도 있고 몰입도가 높다. 이것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준비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곧 자기 사랑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공부란 남을 사랑하는 연애가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특별한 연애가 되는 것이다.
공부도 세습 성향이 강한 부분이다. 첫째가 공부의 유전론이다. 밖으로 공론화시키기 매우 민감한 사안이지만 교육자들 사이에는 널리 알려져 있고 인정하는 사실이다. 실제 연구에 의하면 학업성취도의 유전력(heritability)은 약 60%~70% 정도로 보고 되어 있다. 사람들은 몸을 쓰는 운동 종목은 유전자가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당연하게 인정하면서, 뇌를 사용하는 행위인 공부 쪽에만 유전자가 미치는 영향이 없다고 부정하는 것은 불편한 진실을 감추려는 경향 때문이다. 유명 입시학원 강사가 학생들에게 “난 이미 돈을 많이 벌었으니까 솔직히 얘기해주는 건데, 난 여러분이 여기에서 돈 낭비하는 게 너무 슬퍼. 공부는 하면 되는 놈, 아무리 해도 안 되는 놈이 정해져 있는데 여기 있는 학생들은 대부분 후자야”라고 했단다. 둘째는 경제력에 따른 학력 세습이다.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말은 제주도로’란 말이 있고, 돈도 학생도 서울은 강남, 부산은 해운대로 몰려드는 것이 증명하고 있다. 과거에는 개천에서 용 나는 시절이라면, 지금은 한강에서 용 나는 시대이다. 이 시대의 청춘들은 공부로 신분 상승이 불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 사회에서 공부의 폐해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가? 공부 자체가 아니라 공부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경제적 부담 때문이다. 부모들은 자녀의 사교육비를 감당하기 위해 시간제 일을 해야 하고, 심지어 ‘기러기 아빠’를 양산하여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자녀 공부를 위해 부모가 잠시 떨어져 살기만 하면 다행이다. 결국은 이혼으로 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세계에서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해 부부가 떨어져 사는 유일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대단한 자식 사랑이고 살벌한 교육열이다. 한번 짝짓기를 하면 끝까지 함께하고, 한쪽이 죽더라도 재혼을 하지 않으며, 부부관계가 아름다운 새로 정평이 나 있는 ‘기러기’를 거기에 붙인 이유가 궁금하다. 부부가 서로 희생적인 모습에서 왔다는 설과 자식을 보러 철새인 기러기처럼 먼 곳을 이동한다는 뜻으로 붙였다는 말도 있다.
또 다른 경제적 폐해는 공부한 자신들이 빈곤층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대출받아 비싼 등록금을 내고 졸업했는데, 긴 기간 실직 상태가 되면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복지 수혜자에 위치에 놓이는 것이다. 국가의 복지정책도 위협을 받게 되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사회에 증오와 분노를 폭발시키는 불만 세력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작용한다.
다양한 경험적인 기반과 풍부한 감성을 지니고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유연하게 수정할 수 있는 능력은 생존을 위한 필수이다. 그리고 그런 능력은 넓은 의미의 공부로만 키울 수 있다. 넓은 의미의 공부는 제도교육에서 모자란 창의성과 유연한 사고, 다양성과 순발력을 키워주는 효과가 강하다. 경험도 체험형 소비 상품이다. 사람들은 소유형 소비보다 체험형 소비를 통해서 훨씬 행복감은 느낀다. 여행, 문화 등 다양한 경험을 축적하는 과정이 행복한 시간을 사는 것이고, 당연히 경제적 부담이 따르기 마련이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죽은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학원에 보내지 말고, 여행, 미술관, 음악회, 영화 등을 경험하기 위해 더 노력하는 것이 정답이 아닐까?.
‘행복은 성적순이다.’라는 말은 동의할 수 없지만, ‘행복은 공부 순이다.’라는 말은 공감이 가고 참이다. 사실 공부란 나답게 살아가는 삶을 배우는 과정이다. 그 삶을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드는 최고의 선택이 공부다. 하수는 남을 연구하고, 고수는 나를 연구한단다. 나를 공부하는 데 기한이 없고, 나답게 사는 최고의 방법이다. 누구나 평생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세네카는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사는 법을 배워라.’라고 충고했다. 공부는 롱런(long learn) 해야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어느 선사는 ‘공부하다가 죽어버려라.’ 하고, 어느 시인은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한다. 사실 삶에서 공부와 사랑을 빼면 남는 게 있기는 한가?
공부하다 죽든 사랑하다 죽든, 죽기 전에 마음껏 공부하고 사랑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