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의미다 - 26
‘질투(嫉妬)’는 ‘남을 부러워하는 감정, 또는 부러워하는 감정이 너무 강하여 나타나는 격렬한 증오의 형태’를 말한다. 嫉(미워할 질)은 뜻을 나타내는 女(계집 녀)와 음을 나타내는 疾(병 질)이 합쳐진 글자로 ‘미워하다’를 뜻한다. 妬(샘낼 투)는 뜻을 나타내는 女(계집 녀)와 소리를 나타내는 石(돌 석)이 합쳐진 글자로 ‘샘내다’, ‘질투하다’라는 뜻이다. 嫉妬란 두 글자 모두에 女가 들어가 있어 글자 상으로 여자의 전유물로 생각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질투는 나이, 성별, 직업,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불특정 다수에게서 나타나는 마음이다. ‘시기(猜忌)’란 말이 있는데 우리말의 ‘시샘하다’와 혼용된다. 시기는 갖지 못한 사람이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이고, 시샘은 가진 사람이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질투는 시기보다 훨씬 강하게 시샘하는 것이다. 특히 남녀관계에서 연인이나 배우자가 자기 이외의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생기는 감정으로 자주 사용한다. 연인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내 것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사람이 빼앗으려는 사람이나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이 질투다.
질투는 남녀관계의 사랑에서 발생하는 성적 질투와 경쟁심리의 비사회적 질투가 있다. 동료의 승진을 인정하지 않는 것, 자신의 못난 점을 숨기거나 상대를 깎아내리기 위한 뒷담화, 상대방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거나 무시하는 태도, 경계와 방해를 시도하는 행위 등이 비사회적 질투라 할 수 있다. ‘남의 불행이 내 행복’이란 농담처럼 자주 하는 말도 비사회적 질투의 속마음이 깔려 있다. 이것을 전문용어로 ‘샤덴 프로이데(schadenfreude)’라고 하는데, 타인의 불행, 비교우위를 느끼는 대상의 추락을 보고서 느끼는 쾌감이다. 사람의 뇌는 열등감이 느껴지는 대상의 추락을 보면 자신의 위치가 높아진 것으로 착각하여 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도 있다. 남이 잘되는 꼴을 못 보고 질투하며 시기하는 것을 이르는 속담이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것을 비유할 때 쓰기도 한다.
질투는 생물의 본능이라 할 수 있다. 질투가 결국은 비교우위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사회와 서열의 개념을 갖춘 동물 집단 내에서는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인간이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는 감정 중 하나이기 때문에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고 부정만 할 것은 아니다. 정도만 넘지 않는다면 인간의 다양한 면을 보여주고 또 다른 매력이 될 수 있다. 질투가 매력이라는 커플도 많이 있다. 그래도 인간은 질투의 감정을 잘 숨길 줄 안다.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동물들은 즉각적인 반응과 싸움으로 해결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집에서 반려동물 두 마리 이상 키워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인간 문명은 시기 혹은 질투의 역사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질투’는 인류의 운명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에서도 ‘질투 관리’가 필수적이다. 사실 인류가 한곳에 정착해 여럿이 집단(사회)을 이루며 살기 시작하면서 질투 관리는 매우 어려워졌다. 그래서 법과 제도, 윤리와 도덕 등의 다양한 장치를 통해서 질투 관리를 하고 있다. 세금, 복지제도 등을 통하여 빈부 격차를 해소하고, 도덕적으로 질투를 부도덕한 것으로 치부하며 겸손을 강조하는 것도 모두 질투 관리이다. 특히 한국 사람의 질투는 유난히 강하다. 압축 성장으로 인한 빈부 격차나 신분의 차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경제적 풍요도 정경유착, 부동산 가격 상승 등의 비정상적인 수단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기와 질투가 쉽게 정당화되고, 나아가 분노와 결합한 사회가 될 때 미래가 불분명해지는 위험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 차원의 갈등 관리와 함께 질투 관리가 필수이며 쉽지 않은 과제인 것은 분명하다.
질투는 상대를 혼자만 갖고 싶은 당연한 마음이지만,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사회가 있다는 것을 아는가? 바로 발칸 반도 문화권과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질투가 적극적으로 권장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외출할 때 반드시 착용하는 몸을 가리는 옷(히잡, 차도르, 니캅, 부르카)이 바로 질투의 산물이다. 감춰진 얼굴에 정성들여 화장한다는 것이 더 아이러니다. 집에 온 손님이 배우자의 외모를 칭찬하는 것만으로도 ‘흑심을 품고 있구나’하고 생각하며 질투할 정도다. 터키 등 해당 지방에 여행 갈 때는 모르는 이성에게 길을 묻거나 말을 걸 때 조심할 필요가 있다.
질투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생긴다. 연인관계, 배우자 관계, 형제 관계, 친구 관계, 동료관계, 상하관계 등 질투가 없는 인간관계는 없다. 이중 가장 뜨거운 남녀관계의 사랑에서 질투를 살펴보자.
질투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하지 않던가? 사랑과 질투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이심동체(二心同體)이다. 가슴 설레는 사랑이 올 때는 혼자 오는 것이 아니다. 미움과 질투, 그리움과 아쉬움, 증오와 비참 등이 한배를 타고 오는 승객이다. 그중에 제일 자주 오고 다루기 어려운 손님이 질투다. 특히 남녀관계의 사랑은 한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속성이 있어, 다수가 얽힌 사랑(삼각관계)은 시기와 질투로 불이 활활 타오를 수밖에 없다. 소유애에 빠진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긴장하여 질투에 빠지기 쉽고, 파트너에게 집착하며 의존한다.
인간은 모든 현실과 사람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극히 두려워하는 분리 불안 심리가 있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일수록 분리 불안 심리는 크고, 여기에서 질투의 마음이 싹튼다. 사랑하는 두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으며, 아름다운 연인을 얻으면 그를 잃게 될까 봐 질투의 마음이 불붙는 건 당연하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질투심이 더 심해지고, 정도를 넘어선 경우 질투가 증오로 변하는 경우 범죄로까지 이어진다. 대부분의 치정에 얽힌 범죄가 그렇다. 질투 때문에 살인까지 일어나는 것을 보면 결코 가볍게 볼 감정은 아니다.
질투는 사랑의 바로미터이다. 많은 연인관계의 커플 사이에서 상대의 질투 감정을 교묘하게 이용해 사랑의 불을 지피는 데 이용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남성 셋 중 하나, 여성 둘 중 하나는 질투를 이용해 파트너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는 보고도 있다. 파트너가 버젓이 보는 앞에서 다른 이성에게 관심을 두는 척하거나 그윽한 눈으로 보는 행위가 그것이다. 특히 여자의 경우 정작 파트너는 싫어하는데 다른 남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도발적인 옷을 입거나, 절대 먼저 전화를 걸지 않거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파트너를 살짝 무시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적당한 ‘거리두기’로 사랑의 감정에 질투의 불을 지피곤 한다. 사랑의 기술은 여자가 고수(高手)인 것만은 틀림없다.
사랑의 바로미터로서 질투는 생물학적 기본 장치이다. 질투는 사랑이 활기를 때게 하고, 경각심을 고취하며, 둘 사이의 결속을 강화한다. 이렇게 사랑에 진실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남녀관계 떠나 누가 더 사랑하고 누가 더 사랑받고 있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투하며 사랑하는 것이다. 적당한 질투는 사랑의 적이 아니라, 묘약이다. 이 정도면 질투도 사랑에 속한다.
헤밍웨이도 ‘사랑의 적은 질투가 아니라 권태’라고 했다. 일상의 권태에서 벗어나 초심의 적당한 질투를 되살려 사랑의 불씨를 지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