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의미다 - 103
‘산책(散策)’은 ‘느긋한 기분으로 한가로이 거니는 것’을 말한다. 중국과 일본에서 쓰이는 말로 ‘산보(散步)’란 말이 있는데 바람을 쐬거나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멀지 않은 곳을 이리저리 천천히 거니는 것으로 산책과 거의 같은 뜻이다. 둘 다 불필요한 것을 털어내고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역할을 한다.
散(흩을 산)의 원형은 㪔(떼어놓을 산)으로 林(수풀 림)과 攴(칠 복)으로 이루어진 글자다. 㪔은 삼의 줄기를 막대기로 때려 풀어헤치는 모습을 본떠서 만든 글자로 여기에서 파생되어 ‘흩어지다’, ‘헤어지다’, ‘풀어놓다’ 등을 뜻한다. 策(꾀/채찍 책)은 竹(대나무 죽)과 朿(가시 자)가 합쳐진 글자로 ‘꾀’, 채찍‘의 뜻이다. 이렇게 산책은 흩을 ‘산’과 꾀 ‘책’으로 이루어진 단어로 한자로만 본다면 한가로이 걷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즉 계획적이고 계산적이며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꾀돌이 생각들을 흩어버린다는 깊은 뜻이 담긴 단어이다. 아무 생각 없이 한가롭게 거닐며 잔머리 굴릴 생각들을 날려버리는 행위가 산책이다. 장소뿐 아니라 ‘인문학 산책’, ‘세계사 산책’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산책이란 단어에는 부담 없이 둘러본다는 뜻이 담겨 있다.
산책은 대체 무슨 효과가 있길래 전 인류가 좋아하는 행위가 되었을까. 아마 가장 큰 이유는 머릿속의 리셋 버튼을 누르는 효과가 아닐까. 한마디로 정신건강에 좋다는 것이다. 많은 일들을 고민하고 생각이 많아지면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 일상생활에 많을 영향을 준다. 하루에 잠시만이라도 이러한 생각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산책은 잠시 육체적 정신적 일에서 벗어나 자연과 함께하며 하나가 되는 시간이다. 구체적으로 산책의 효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산책은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감을 증진한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은 욕구를 가진다. 그런 의미에서 산책은 탁월한 신체적, 정신적 활동이다. 공원의 숲속에서 코를 벌름거리며 천천히 걸어보라. 주변의 나무들과 새, 그리고 들꽃들을 본다.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도 듣는다. 이처럼 산책은 오감을 자극하며 몸에 생동감이 들게 한다. 활력이 솟아나는 기분은 자연스레 행복감으로 충만하여 힐링의 시간으로 충분하다.
둘째, 뇌에 산소를 공급하여 두뇌활동을 활발하게 한다. 뇌는 늘 새로운 산소를 공급해 주어야 하는데 산책은 이 역할을 훌륭히 담당한다. 좋은 산소를 꾸준히 공급해 줄 뿐만 아니라 두뇌활동을 활발하게 하여 치매 예방에도 도움을 준다.
셋째, 창의성 있는 아이디어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일상의 복잡한 생각을 버리고 뇌의 활동을 활발하게 해서 새로운 생각이 유레카하고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중요한 일을 할지라도 한 장소에 하루 종일 박혀서 있으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몸을 움직여야만 머리도 활성화될 수 있다. 심지어 중요한 일을 논할 때 산책 회의나 인터뷰한다고도 한다.
마지막으로, 육체적 건강에 도움이 된다. 산책은 꾸준히 하면 다이어트 효과는 물론이고 장기적인 건강 관리, 관절염 및 고혈압 예방, 뼈와 근육 강화 등 여러 효과가 있다. 이렇게 정신적 건강과 육체적 건강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산책은 전 세계인이 가장 많이 하는 운동으로 자리 잡았고, 오늘 이 시간에도 산책에 나서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창조적 사고에 관한 연구자인 윌러스는 창조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그 문제로부터 몸과 마음이 일시적으로 떠나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해결이 안 되는 심각한 문제로부터 잠시 떠나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제 해결을 위한 통찰이 불현듯 찾아온다는 것이다. 창조적 해결을 위한 침묵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안 풀리는 문제를 계속 끌어안고 있어 봐야 아무 도움이 안 된다. 풀리지 않는 문제로 괴롭고 힘들면, 그 문제로부터 잠시 벗어나기 위한 좋은 방법으로 산책이 있다. 예부터 생각이 잘 되는 세 장소를 삼상지학(三上之學)라 하였는데 그 장소가 바로 침상(枕上), 마상(馬上), 측상(厠上)이다(송나라의 시인 구양수가 한 말). 지금으로 보면 침대, 버스, 화장실이다. 오늘날은 거기에 하나를 더해 산책이 있다 할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무엇이든 빨리 해야 한다는 ‘빨리빨리’ 문화에 젖어있다. 빨리 해야 효율성이 올라가고, 빨리 못하면 더 많은 시간을 해야 효율을 높인다고 생각한다. 한편 쉬지 않고 기계처럼 돌아가는 것이 산업사회에서 꽤 합리적으로 보인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위험한 생각이다. ‘더 빨리’, ‘더 많이’에 가치를 두고 높은 효율성이라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이러한 효율성을 무작정 쫓아가다 보면 사람들과 함께할 기회도 ‘나’를 찾을 기회도 사라진다. 이럴 때 숨 쉴 틈 없는 우리에게 오아시스 같은 존재가 여유 있는 산책이다. 한가로이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자기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는 길이다. 느긋하게 그리고 온전히 풍경을 즐기며 걷다 보면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산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행위는 걷는 것이다. 달리는 것을 산책이라 하지 않으며 자전거나 자동차로 움직이는 것과는 다르다. ‘걷는다’라는 것은 두 발로 땅의 기운을 몸으로 느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자동차로 드라이브하는 것과 달리 주변의 풍경을 음미할 시간이 충분하다. 주변의 풍경을 스치듯 달리는 자전거나 자동차와는 차원이 다르다. 기차를 타고 지나치는 풍경보다 천천히 걸으며 즐기는 풍경이 훨씬 아름답고 새롭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하지 않던가. 그렇게 느리게 걷다 만난 자연과 나누는 반가움은 우리의 삶을 더욱더 풍요롭게 만든다.
산책이란 대개 한가롭고 여유 있는 상황에서 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때때로 고통이나 고립감을 잊으려는 방편으로 선택되는 수도 있다. 그럴 때 산책은 마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집이라는 공간에 고립되어 있을 때, 사람은 고통에 더욱 취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럴 때는 바깥으로 나간다는 자체만으로도 어느 정도 마음이 고독과 소외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내가 움직일 때 세상의 풍경도 친구가 되어 내 속도에 맞게 따라온다. 달밤에 산책하면 나를 따라오는 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주변의 풍경과 맞추어 움직이면서 마음이 안정된다.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 정지 상태에서 더 많은 불안을 느끼고 불안해지기 때문에 안절부절 가만히 있지 못한다. 이럴 때 벌떡 일어서 밖으로 나가보라. 불안한 마음이 한층 안정을 찾을 것이다.
이렇게 누구나 산책하지만, 그 이유는 제각각이다. 산책이 누군가에겐 한가로운 즐거움이고, 어떤 이들에겐 건강을 위한 신체의 운동이기도 하다. 또 다른 누군가에겐 고민과 생각을 털어버리는 행위가 되고 새로운 생각을 끄집어내는 창의력의 장이 되어주기도 한다. 한편 불안과 고통을 잊으려는 절박한 행위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산책은 그들 각각의 삶의 모습과 닮았다. 한가로운 일도, 절박한 일이 되기도 하는.
어찌 되었든 세상을 살다 보면 온갖 시름이 없을 수 없고, 나이 들면 몸을 움직이는 것이 천근만근이다. 우리 몸의 무게 중심이 낮아질수록 편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땅속과 가까워진다는 깊은 뜻을 헤아릴 일이다. 시쳇말로 사람은 '걸을 수 있을 때까지가 살아 있는 것이다.'란 말이 있다. 태어나 처음으로 배우는 것이 ‘걸음마’라면 걸음마를 마치는 날이 생을 마감하는 날이 아닌가.
누워서 뒹굴수록 땅속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당장 털고 일어서 밖으로 나가라. 내 몸과 마음을 위한 첫걸음을 떼라. 상쾌하고 행복한 하루가 시작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