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 쓸쓸함에 대하여

선택받지 않은 다행스러움 9.3. 2025

by Michelle Jeong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해서 대학시절을 보냈던 나의 좌충우돌기이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가톨릭 전신인 이 학교를 선택하던 때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소속 교회에서 40세부터 장로로 섬기던 아버지는 내가 기독교 학교를 선택하도록 엄청난 압력을 넣었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을 남기고 포기하였다. 학교를 지원할 때도 다행히 남동생이 같이 따라와 주었고 밤이 되어서야 버스터미널에 도착한 바람에 반포아파트 근처 독서실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하였고 그다음 날 아침에 학교 지원을 마칠 수가 있었다. 그때는 큰아버지 댁이 중랑구라 아예 겁을 먹고

가지를 못했던 것 같다. 그 이후 논술시험 일정에 맞춰서는 신혼이던 큰집 오빠네가 살던 휘경동 전셋집에서 묵게 되었다. 학교가 강남 버스터미널 근처인데 길을 모르니 논술시험 당일날은 오빠가 함께 동행하여 주었다. 전철 안에서 오빠는 15분 정도 늦을 거라고 알려주었다. 마지막 전철역에서부터 난 오빠 손에 붙들려 마냥 15분 정도를 달렸던 것 같다. 지금도 나의 기억에 시험장 문은 닫혀 있었고 간호학과 교수님 한 분이 앞에 있었다. 헐떡거리며 겁에 질려있는 나를 강당 안으로 데리고 가서

뒤 쪽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이렇게 나의 처음 시작이 어긋나서일까. 신촌의 모대학에 다니던 동창의 친구인 그 아이를 만났을 때 첫사랑의 풋풋한 감정을 갖게 되었다. 그 당시 지방

학생들에게 유행하던 자택과외를 하던 그 아이와 중랑구에 사는 큰아버지 집에 머물던 나는 서로 연락할 수 있는 어떤 연락수단도 없었다. 한 달에 한번 학보를 보냈던가 보다. 어쩌다가 집으로 전화를 시도해 봤지만 그 아이의 여자 주인의 냉랭한 목소리와 함께 지금 바꿔줄 수 없다며 끊겨버리곤 했고 그 아이 역시 무서운 큰아버지의 목소리와 함께 나와의 통화는 거의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게다가 1987년은 대한민국 역사상 대 격동기이기도 했지만 갓 대학 신입생이 되어 서울살이를 시작한 나에게도 빅펀치를 날린 애증의 시간이었다. 그때 내가 가졌던 생각은 지금 연애감정은 너무 이기적인 것이었다. 그 아이와는 시대적인 이야기 그리고 읽었던 책이야기 등등, 전혀 감정이 섞이지 않은 대화위주였다. 그러다 그 아이는 멀어져 갔다. 그 이후 친구를 통해 듣게 된 소식은 대학시절부터 알고 지낸 모여대 여자친구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고 있다고 한다.


오십 대 중반으로 들어선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제대로 되지 않던 나의 대학시절이 그저 가슴을 죄여오는 아픔일 뿐이다. 모든 것에서 잃기만 한 시절, 그리고 얻는 것은 거대한 좌절감뿐이었다. 이십 대 후반부터 해외살이를 시작한 나에게 떠올려본 첫사랑은 씁쓸하고 밋밋하기만 하다. 그러다가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이 다가온다. 많은 이들의 첫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나 역시 그렇지만 그 시절 많은 선택이 가능했던 시절 나는 그저 밋밋하고 초라하게 누군가의 기억에서 사라졌음이 감사할 뿐이다. 내가 만약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또다시 그 상황을 맞닥뜨린다면 난 최소한 그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감정노동보다는 공동체 안에서 더불어 행복함을 추구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