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탈리스트
부르탈리스트
설민
부르탈리즘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유행한 건축양식을 뜻한다고 한다. 콘크리트가 노출된 건축물로 안도 다다오가 대표적인 건축가이다. 단순한 형태의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특징인 부르탈리즘은 노출된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 건축물과 기하학적인 건물 구조를 조성하며 심플하게 표현하는 방식이다.
부르탈리즘을 모티브로 한 영화 [부르탈리스트]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천재적인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 토스의 인생을 다루고 있다. 그는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했고,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촉망받는 젊은 건축가로 살다가 강제수용소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후에 미국 뉴욕으로 넘어오게 된다. 그가 붐비는 군중 속을 지나 문을 열고 나가자, 눈앞에 자유의 여신상이 나타난다. 하지만 화면 속 그 여신상은 거꾸로 또는 옆으로 비친다. 자유를 찾아 고국을 떠나왔지만 마치 그조차 왜곡될 수 있다는 상징을 나타내는 듯하다.
전쟁의 트라우마를 뒤로하고 미국에서 정착한 그의 인생은 완전 나락으로 떨어졌다. 조카와 아내가 미국으로 망명하기를 애타게 기다리며, 처음에는 사촌 집에서 지냈지만, 사업을 망치고 아내에게 추근댔다는 오명을 받아 쫓겨났다. 노숙자 쉼터에서 살면서 막노동을 하는 등 갖은 고생을 다 한다. 사촌이 운영하는 가구점 이름이 ‘Miller & Sons’이지만 그는 밀러도 아니고 아들도 없다. 마치 자본주의로 포장한 가족적인 이미지다. 처음으로 라즐로 토스가 만든 의자는 예술성이 돋보였지만, 사촌의 아내는 세발자전거 같다고 깎아내린다. 예술이 기능성과 이익 논리에 갇히는 현실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어느 날 막노동을 하고 있는 라즐로에게 백만장자 사업가 해리슨 리 밴 뷰런이 찾아온다. 사촌 사업을 망치게 한 장본인이 찾아온 셈이다. 그의 아들 해리가 서재를 리모델링해 달라고 제안했지만, 허락을 받지 않고 한 일이기에 실내장식 비용도 받지 못하고 쫓겨난 것. 하지만 밴 뷰런은 라즐로가 인테리어 한 서재로 명성을 얻으며 잡지에 실리기까지 하자, 그를 찾아 나선 것이다. 라즐로에 대해 알아본 밴 뷰런은 그의 엄마인 마거릿 리 밴 뷰런을 기리는 문화센터를 함께 짓자고 제안을 한다. 하지만 유대인이라는 편견과 비용을 줄이겠다면서 설계를 변경하고 견해 차이를 밝히는 밴 뷰런의 아들과 부딪히게 되고 끝내 자재를 옮기던 기차가 탈선하는 안전사고가 일어나자 소송까지 이어지며 공사는 중단되고 만다.
해리슨과 만남이 처음에는 인생의 밑바닥에 있는 라즐로를 도와주는 귀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라슬로의 재능만을 이용하려는 고용주였다는 느낌이 강해진다. 우여곡절 끝에 공사가 마무리되고 화면이 바뀐다.
1980년 건축 비엔날레에서 ‘위대한 건축가 라즐로 토스의 회고전’이 열렸고 조카 조피아와 조카 손녀가 휠체어에 탄 늙은 라즐로와 함께 등장하며 그의 업적을 기린다.
그의 지난날의 인생이 모두 녹아있는 문화센터. 그가 지냈던 강제수용소의 방의 크기를 정확히 재현해서 숨 막히는 폐쇄적인 공간들로 구성이 되어 있었지만, 위를 바라보면 20m 높이의 유리 지붕이 있어서 탁 트인 자유를 느끼게 했다. 햇빛을 이용해 십자가의 모습을 그림자로 만들어놓은 기도실도 관건이다. 건물 내에는 아내가 갇혔던 수용소도 재현했고 수많은 비밀 통로로 연결을 해서 아내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참혹했던 전쟁과 힘든 삶에서 살아남은 자신처럼 콘크리트로 굳건하게 만들어진 자신의 건축물은 어떤 일이 생겨도 도시에 남아있을 거라는 자신을 한 라즐로 토스. 그의 고단했던 인생이 건물에 그대로 녹아있다.
이 영화는 거친 재료를 그대로 드러내는 건축양식인 부르탈리즘과 맞닿아 있다.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야기를 드러내지 않으므로 상상하게 만든다. 그것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둔 채 날것 그 자체를 드러낸다.
라즐로 토스의 삶은 이상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그 이상이 현실에 부딪히며 꺾이고, 무너지며, 결국 잔해만 남는다. 창작을 철학으로 여기는 라즐로에 비해 해리슨은 그저 도구로 본다. 영화는 이 둘의 충돌을 통해 예술가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소비되고 파괴되는지를 보여준다. 기회의 땅이자 자유의 나라가 아닌 자신에게 순응하지 않는 타자에게는 말없이 외면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미국의 신화, 아메리칸드림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보여준다. “꿈을 실현하는 공간”이 아닌 꿈을 외면하고 인격을 왜곡하는 공간으로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