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수선화 삶 03화

3화 내가 탄 버스는 수산 간 데이

by 단려

읍내 장날이라 그녀는 마을 정류장에 서 있다.

오늘따라 버스가 좀처럼 오지 않는다. 불안한 마음에 이리저리 눈동자를 돌린다. 손목엔 시계를 찼지만 익숙지 않다.

“몇 시 좀 지났네”하는 정도가 그녀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다.

한글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는 글자가 손에 꼽을 정도다.

버스 시간을 놓친 건 아닐까 조바심이 들었다. 그때 그녀는 정류장 위 이정표를 보았다.

한참을 올려다본 그녀는 땅바닥에 발끝으로 천천히 글자를 써 본다.

“대..평..”

그녀는 흙바닥에 쓴 글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이정표의 글자를 번갈아 살폈다. 얼마 후 버스가 왔다. 버스에 오르다 말고 다시 내려 버스에 쓰인 글자를 읽었다.

“수.. 산..”

그녀는 다시 버스 기사의 얼굴을 쳐다본다.

“할머니~! 빨리 안 탑니꺼? 안 그래도 늦었는데...”

퉁명스러운 기사의 말에 얼른 차에 올라 빈 좌석에 앉았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글자를 써 본다.

“수.. 산..”

작은 소리로 따라 중얼거려 본다.

그녀는 지나간 달력 한 장을 뜯었다. 쪼그리듯 엎드려 깨 알 같은 글씨를 쓰기 시작한다. 얼마 전부터 시작한 한글공부는 저녁을 먹고 난 후 일과가 되었다. 평생을 글을 모르고 살았지만 얼마 전부터 경로당에 한글 선생님이 오신다.

‘이제 나도 글을 깨칠 수 있겠구나’ 마을 아낙네들은 설렌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경로당 학생들의 글은 생각처럼 쉽게 익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 학생들에게 이번 달에는 자기 이름과 주소를 또박또박 쓰는 걸 목표로 해 보자고 했다.

“에구구, 또 틀렸네. 경남을 뺐네. 뺐어. 쯧쯧” 그녀는 혼잣말로 틀린 글자를 타박한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창밖에는 별빛이 소리 없이 내려앉는다. 몇 번을 반복한 글이 어느새 달력 한 장에 작은 무늬가 새겨졌다. 몇 번을 반복하고 몇 번을 고쳐 쓴 글을 잊을까 달력을 돌돌 말면서 주소를 읊조린다.

“경남 밀양시...”익숙지 않은 글자가 혀끝에서 맴돈다.

내일은 감자 밭에 나가야 하니 눈을 붙이려 눕는다. 어둠이 보낸 별은 창가를 지나간 지 오래지만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에 아직도 한 글자 한 글자가 반짝인다.

들녘 일을 마치고 서둘러 저녁을 먹었다. 달력을 돌돌 말아 쥐고, 책가방을 메고 나섰다. 어스름이 내려앉은 저녁 무렵, 경로당의 불빛이 훤하다. 벌써 동네 아낙들이 모였다. 아낙이라고 하지만 70세가 훌쩍 넘겨 80에 가까운 할머니들. 밥상을 몇 개 붙여 놓고 둘러앉아 숙제를 한 공책을 펼쳐 본다.

평소에 말이 없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우리 마을 정류소에 수산 간다 쓰여 있대.” 글자를 알아본 기쁨을 자랑하고픈 마음을 감추지 못한 말이었다.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지만 그 뜻을 알아들은 할머니들은 몇이나 되었을까?

나는 얼른 칠판에 마을 앞 정류소 이정표를 그렸다. 그리고 그곳에 표시된 글자를 또박또박 읽었다. 그리고 우리가 쓴 주소에 같은 글을 찾아보았다. 아낙들은 저마다 공책에 적힌 글과 칠판의 글을 번갈아 살폈다.

“아~!”하는 탄성이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글을 알기 전 그들은 대충 이때쯤 낯익은 기사의 얼굴을 보면 그 차가 수산 가는 차라고 짐작하곤 했다. 그 짐작은 틀리지 않았고 그렇게 수 십 년 세월을 지냈다. 그렇다고 그들의 자녀들이 훌륭하게 성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자녀들 역시 우리 엄마는 글을 모르는 분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래서 전화기에 단축번호를 저장해 두고 단축번호 위에 어머니가 알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 어머니가 필요할 때 그들에게 전화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제 글을 배워 뭣하나?” 하며 망설이던 분들이 글자를 배운다.

그들은 아직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고 두 손을 움직일 수 있으면 마을 품앗이 일을 한다. 약간의 용돈을 벌고 허리춤 전대에 넣어 두었다 손주가 오면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꺼내 쥐어주는 재미로 살았던 분들이다. 하지만 이제는 오롯이 자신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응원한다. 그리고 나를 응원한다. 내가 정성을 다해 그들을 찾아갈 때 조금씩 익혀가는 글자들이 그들에게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짠한 깨우침은 나의 감성을 자극한다. 그들은 어린 시절 6.25를 겪고 일제 강점기를 기억한다. 어려운 살림살이에 가족을 위해 희생하신 어머님들이다. 오늘도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길에 해무가 자욱한 들판을 지나 그들을 만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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