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을 향하는 여름달이 밤하늘을 밝힌다.
아직 어머님들과 나눈 이야기를 정리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길을 안내하는 것 같다. 하늘과 맞닿은 삼랑진 끝 동네 마을 회관에서 어머님들 한글 수업을 하고 나가는 길이다. 늘 빠지지 않고 자리를 채워 앉아계시는 어머님들은 이 시간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이다.
“낮에 밭일하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어떻게 한 번도 결석 안 하고 오세요? "
고된 하루 일을 마치고 드라마를 보며 누워 있을 법도 한데 한 글자 배워보겠다고 오시는 문해교실 어머님들이다.
“궁금해서 안 돼.”
회관 아랫마을에 사는 어머님이 애교스럽게 말했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 설레기도 하단 말이야.”
밭일은 안 하지만 나이가 지긋한 어머니는 저녁시간에 모여 이야기 듣는 것이 즐겁다고 한다.
모이신 어머님들은 고개를 끄덕거린다. 아무렴 글을 몰라도 평생을 살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을까? 그들은 동네 아낙들과 함께 모일 수 있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듣는 이 순간을 즐긴다.
처음 이곳을 배정받아 찾아오는 길은 낯설었다. 지명만 알고 내비게이션에 의존한 채 찾아오는 길은 산업공단으로 안내를 하였고 잘못 들어왔나 한참을 망설였다. 조금 더 가보자며 가다 보니 마을이 나왔다. 여긴가 싶었는데 다시 내비게이션은 더 깊숙한 곳으로 길 안내를 한다. 그렇게 찾아가는 동네는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산업공단을 지나 이런 자연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이곳에는 인생의 완숙미를 열심히 다지고 계시는 어머님들이 계셨다. 마을 회관의 기운이 밝고 달콤하다. 온기가 느껴졌다. 낯선 이방인을 반가이 맞이하여 주고 눈망울 망울마다 초롱한 아이의 눈빛을 발사했다. 어머님들에게 어렵고 힘든 공부를 어떻게 재미있고 즐겁게 이끌고 가야 하는지가 커다란 과제였다. 하지만 이러한 걱정은 한낮 기우에 불과했다. 어머님들은 열정과 의욕이 충만했다. 그들에게 내가 빨려 들어가 같은 색깔을 뿜어내고 있다.
늘 보는 얼굴이지만 단짝 친구 어머님은 소곤소곤 수업 내내 주거니 받거니 한다. 나도 그쪽에 귀를 기울이지만 내게는 안 들려준다. 참지 못한 나는 정겨운 이야기를 같이 듣고 싶다고 했다. 여기 오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담장 가로지른 단짝 동무라고 한다. 오랜 세월 담 하나를 두고 살아온 사이라고 하는데 가만히 보면 닮기도 닮아 보인다. 회관의 궂은일은 마다하지 않는 부녀회 총무어머님의 봉사는 눈에 뜨일 정도로 부산하게 움직인다. 회관에 수업은 어느새 무르익고 있다. 이곳에 나란히 앉아서 서로 챙기는 시누이올케사이 모습이 정겹다. 씩씩한 올케는 이 회관에 분위기 메이커이다.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써 보자고 제안했다. 6.25를 겪고 일제 강점기를 겪은 어머님은 시리고 아픈 추억을 담고 싶지 않다며 손 사례를 치신다. 구순이 되어가는 마을 터주 대감 어르신은 만다라 그림에 세상 해탈한 모습을 담아주신다. 개울 물 넘쳐 신랑이 업어 건네준 것을 들킨 어머님은 동네 원앙부부라고 소문이 나 있다. 밭일을 하고 고된 몸으로 자리를 함께 하는 젊은 어머님은 어젯밤 출몰한 멧돼지로 옥수수 밭, 복숭아밭이 망가진 아무개 댁의 일 년 농사 걱정을 한다. 마을 회관의 야학은 이야기꽃으로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른다. 그사이 허리수술로 한 달째 얼굴을 뵙지 못하는 어머님의 안부는 늘 궁금하다.
문해교육은 글자만 공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녹아있는 삶을 나누고 지혜를 배운다.
지식은 살아온 경험과 지혜를 따라갈 수 없다. 이곳에 와서 내가 받아가는 기운과 인성은 지금까지 살아온 나를 반성하고 배우게 해 준다.
하늘에 구름이 달을 품는다. 어머님들이 나를 품고 내가 그들을 품듯 그 사이로 나오는 빛이 밝게 빛난다. 늦은 밤 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는 내가 함께 어우러져 갈 수 있었던 오늘 밤이 무척 행복하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