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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trainer
Feb 13. 2024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내가 늘 가슴에 두고 묵상하는 함석헌 님의 詩, 여섯 연으로 된 짧은 내용이지만 의미가 깊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이 詩를 보며 예전에 한 선배는 그중 하나만 해당되어도 괜찮은 인생이라고 했다.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그 물음에 빙그레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유신시절 정의를 외치다 밉보여 교단에서 쫓겨난 뒤, 작은 고물상을 하며 이웃을 섬기던 송용진 선생님(얼마 전 고인이 되셨음)이다.
교사의 권위가 꽤 있던 시절, 선생님은 온유함으로 묵묵히 학생들을 감싸는 분이셨다. 성심을 다해 가르치면서도 공부보다 바른 인격을, 무엇이 되는가 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강조하셨다. 그런 선생님을 학생들은 신뢰하며 따랐었다.
교직에서 나온 선생님 삶은 고물상을 하면서도 빛이 났다. 그는 늘 만나는 이들을 친절하게 대했고, 약자들을 위해 공부해 가면서 법적인 문제를 처리해 주었으며, 굶는 이들에겐 아낌없이 양식을 내주었다. 그런 선생님의 고물상은 가난한 이웃들의 일터요 쉼터요 의지처였다.
내가 젊었을 때 잠시 눈을 감으면 억대의 큰돈을 합법적으로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견물생심이라고 마음이 흔들려 고민하다 선생님을 찾아 상담했다. 내 얘길 들은 후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한 번이 무척 중요하다. 그 한 번을 지켜내지 못하면, 앞으로 계속 지켜내지 못하게 돼. 온 힘을 다해 마음을 지켜내야 한다." 그리고 내게 이 詩를 주며 격려하셨다. "부디 진실하게 살아서 다른 이에게 그 사람이 돼 주라. 넌 할 수 있을 거야."
넌 할 수 있을 거란 선생님의 격려에 나도 모르는 용기가 생겼다. 난 양심을 택하는 결단을 했고, 살아오면서 마음을 지키느라 손해 보며 바보 소릴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 선택에 후회는 없고, 지금 다시 그 상황이 주어진다 해도 난 그때처럼 할 것이다.
선생님의 삶을 통해 '섬김'의 참모습을 보았고 참 의미를 배웠다. 그 후로 나는 가난한 이웃을 대할 때 선생님처럼 하려 노력한다. 어느덧 나도 그때 선생님 나이인 50대 중반이 됐는데,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을까? 그 물음에 자신이 없어진다. 고귀한 삶을 사셨던 선생님이 더욱 훌륭하게 느껴지는 오늘, 주어진 삶을 더 진실되게 살아 선생님 같은 존재가 되겠다는 결심을 다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