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 trainer Feb 28. 2024

나를 기다리신 아버지

도서관에 가려는데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법원에 처리할 서류가 있는데 시간 좀 있느냐는, 자취하며 공부하는 아들의 시간을 뺏는 것이 미안한 듯한 목소리였다. 나가겠다고 했다.  
약속 시간이 되어 출발하려는데 다시 벨이 울려 받으니, 할 얘기가 있으니 급히 만나자는 ○○의 전화였다.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당연히 선약이 있다며 다음에 만나자고 해야 지만, 내가 에 두고 좋아하는 그녀였기에 망설이다 잠깐이면 된다는 말에 바로 가겠다고 했다.  

그녀에게 가 고민을 들어주고 보니 어느새 거리엔 비가 내렸고 아버지와 약속한 시간은 2시간이 지나 있었다. 비 내리고 시간도 많이 지났으니 근처에 사는 누님 집으로 가셨겠지 생각하며, 아버지와의 약속 장소로 갔다가 눈에 들어온 광경을 보고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일흔아홉 노인인 아버지가 정류장 옆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비를 맞으며 나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급한 일이 생겨 늦었다고 거짓을 둘러대며 죄송하다는 내게 " 일 생긴 거 아닌지 걱정했는데, 별일 없으니 다행이다. 어서 가자." 아버지가 짧게 말했다.
서둘러 법원 일을 마치고 돌아와 책상에 앉은 저녁 다시 눈물이 난다. 여자에 맘을 뺏겨 선약마저 어긴 채 연로한 아버지를 비 맞게 한 내가 미워 울고, 자리를 비운 사이 내가 왔다 그냥 갈까 봐 소변을 참으며 늦는 아들을 염려하신 아버지 사랑에 감격하여 우는 밤이다. -1989.7.12-





삶이 너무 힘들어 생을 포기하려 했을 때 메모집과 일기장을 한데 모아 불태웠었다. 그래서 젊었을 때의 기록은 없다. 그러다 몇 해 전 이사하게 되어 짐을 싸던 중 책 속에 꽂힌 3편의 글을 발견했다. 윗글은 요행히 살아남아 나와 함께 세월을 견뎌온 그중 하나다.

글을 정리하다 아버지의 노년마저 편하게 해드리지 못한 불효가 떠올라 울며 그때 그 장소를 찾아갔다. 그날 아버지가 나를 기다리신 그 정류장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 속에서 아버지를 오래도록 그리워했다.

어느덧 30년 세월이 흘렀다. 아버지는 오래전 먼 여행을 떠나셨고 당시 철없는 25살 아들이던 나는 25살 아들을 둔 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는 가셨지만 내게 신 사랑은 가슴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한없는 사랑을 받았음에 감사하며, 나도 '아버지처럼' 깊은 사랑을 주는 아버지가 되려 한다.  

작가의 이전글 나를 독서의 길로 인도한 R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