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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달음의 샘물 Jan 19. 2024

슬픔과 한을 간직한 나라, "리투아니아"

Chapter 9. 쿠르슈 사주(Kursiu Nerija) 

# 첫째 마당: 이야기를 시작하며


오늘 나는 쿠르슈 사주(Kursiu Nerija)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말이 쉬워 쿠르슈 사주이지 쿠르슈 사주는 그 길이만도 98km에 이르며, 이곳에는 많은 마을과 도시들이 들어서 있다. 이런 이유로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쿠르슈 사주에 있는 마을과 도시 중에서 내가 둘러본 두 곳, 즉 니다(Nida)와 유오드크란테(Juodkrante)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 둔다.  


한편 쿠르슈 사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안 퇴적지형'의 종류에 관한 약간의 기초 지식이 필요하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 자신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바닷가 모래사장 뒤쪽에 형성되어 있는 모래 언덕을 바라보기만 했지, 그것의 생성원인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려고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막연하게 모래언덕이라고 불러왔던 것들이 사실은 그 생성원인을 각기 달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놀랍게도 그 생성원인을 기준으로 아예 다른 용어로 불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우리가 그저 모래언덕이라고 불러왔던 것들에는 정확히 말하면 다음과 같은 3종류의 것이 있는 것이다.    


(1) 먼저 사구(沙丘, Dune)는 사빈(沙濱,  바닷가 모래사장)의 모래가 바람에 날려 쌓인 모래언덕, 그러니까 바람의 퇴적작용으로 이루어진 모래 언덕을 말하며,  

(2) 다음으로 사취(砂嘴, Spit)는 사구와 달리 연안류와 파랑(波浪)의 퇴적으로 이루어진 좁고 기다란 퇴적지형을 말하는데, 솔직히 사구와 사취를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3) 한편 서로 다른 방향에서 생성되기 시작한 사취가 서로 만나 이루어지는 (아주 기다란) 지형에 대해서는 특히 사주(沙州, Sand Bar)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기를 읽어 보려 했었는데, 이게 도대체 뭔 일이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리투아니아란 나라를 여행하기 위해 해안 퇴적지형의 종류까지 알고 있어야 하는 건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부터 우리가 함께 가 볼 쿠르슈 사주(Kursiu Nerija)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같은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을 뿐, 그저 광활한 모래언덕을 한번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이 부분은 그냥 Skip해도 무방하다.    



# 둘째 마당: 우리가 가려는 곳의 이름은... 쿠르슈 사주(Kursiu Nerija)



지금부터 우리가 떠나 볼 곳인 쿠르슈 사주(Kursiu Nerija)를 소개하는 책자나 인터넷 기사들 가운데에는 이곳을 쿠르슈 '사구(沙丘)'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사구, 사취 그리고  사주를 구분하는 용어례에 따르면, 이곳은 쿠르슈 사주(砂州)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아, 이곳을 부르는 이름인 쿠르슈 사주(Kursiu Nerija)는 리투아니아어이고, 영어로는 이곳을 Curonian Spit(큐로니안 사주)이라고 부른다.  

쿠르슈 사주를 위의 사진처럼 그저 적당히 기다란 모래언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그야말로 큰 착각이다. 만약 쿠르슈 사주가 그 정도라고 한다면, 그를 보려고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수도 없이 몰려오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유네스코가 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쿠르슈 사주는 폭 0.4km~4km에, 길이 98km에 이르는 상상 이상의 거대한 모래언덕인데, 말로써는 느낌이 잘 안 올 테니 하늘에서 잡은 쿠르슈 사주의 모습(그것도 일부)을 보여 주도록 하겠다. 아, 98km면  대략 서울에서 천안에 이르는 정도의 거리이다.


한편 쿠르슈 사주로 인해 바다(발틱해)는 둘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쿠르슈 사주와 육지 사이에 있는 바다는 사실상 호수와 다를 바 없다. 이런 곳을 '석호(潟湖)' 또는 '라군(Lagoon)'이라고 부르는데, 석호는 바다와 어느 정도 분리되면서 염도 또한 점차 낮아지게 된다. 이 때문에 석호는 바다와 민물의 중간 정도의 소금기를 갖게 된다 



### 셋째 마당: 쿠르슈 사주, 어떻게 갈 것인가?



쿠르슈 사주는 어마어마한 길이를 자랑하는 모래 언덕으로 유럽대륙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반도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다. 그러니 쿠르슈 사주를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해요?라는 질문처럼 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없다. 다만  효과적 여행을 위한 안내 차원에서 아래의 지도를 가지고 간단히 쿠르슈 사주를 찾아가는 방법을 이야기해 보기로 하겠다.     


일단 지도 왼편에 발틱해를 둘로 나누며 가로지르고 있는 기다란 모습의 육지가 보일텐데, 그것이 바로 쿠르슈 사주이다. 그리고 쿠르슈 사주 중간 부분에 내가 목적지로 찾아 놓은 '니다(Nida)'라는 곳 밑으로 푸른색 실선이 보일 텐데, 그것이 리투아니아와 러시아의 국경선이다. 그리고 국경선 밑은 러시아가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허용하면서도 끝내 반환하지 않아 여전히 러시아령으로 남아 있는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이다.  


따라서 쿠르슈 사주를 찾아가는 방법에는 (1) 폴란드에서 북쪽으로 오르면서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를 통과하는 것과 (2) 리투아니아의 다른 도시들을 돌아본 후에 지도 북쪽의 클라이페다(Klaipeda)를 거쳐 들어가는 2가지가 있게 된다. 이 경우 (1)과 같은 루트를 택하려면 반드시 러시아 비자를 갖고 있어야 한다.

위의 두 가지 방법 중 나는 리투아니아의 도시들을 돌아보고 나서 클라이페다를 거쳐 쿠르슈 사주로 가는 루트를 택했다. 한편 쿠르슈 사주와 클라이페다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데, 이 때문에 클라이페다에서 쿠르슈 사주로 가기 위해서는 배를 이용하여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자동차를 가지고 쿠르슈 사주로 가는 관광객들을 위해 카 페리가 운행되고 있는데, 운행 간격은 계절에 따라 차이가 있다(성수기에는 30분 간격). 

카 페리의 실제 운행 시간은  3~4분 남짓으로 아주 짧다. 페리가 출항하면 갈매기들이 날아오르며 배를 쫓아오는데, 우리나라의 갈매기들이 새우깡 등의 대가를 얻는 것과 달리 리투아니아의 갈매기들은 쓸데없는 날갯짓으로 헛힘만 쓸 뿐이다. 저 멀리 떠나온 클라이페다의 선착장에 내가 타고 있는 배와 같은 크기의 페리가 정박해 있는 모습이 보인다.  

쿠르슈 사주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안내 지도를 통해 쿠르슈 사주의 전체 모습을 이해해 둘 것이 필요한데, 먼저 안내지도의 오른쪽 끝이 클라이페다에서 페리를 타고 건너오는 쪽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수십 킬로미터에 걸쳐 모래언덕이 펼쳐지게 되는데, 모래언덕의 규모가 가장 큰 곳은 지도 중간의 옅은 베이지색 부분이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주변의 곶(串)들과 해안선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워서 사주가 제공하는 뷰를 만끽하기에 가장 적당한 곳은 베이지색의 왼쪽 끝부분에 있는 파친티니스(Pažintinis)인데, 실제로 모래언덕을 걸어 바다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곳도 이곳밖에는 없다. 


쿠르슈 사주 가운데 상대적으로 모래의 퇴적량이 많지 않고, 자연림 +방풍림으로 숲이 적당히 우거진 곳에는 마을이 들어서 있는데, 대표적인 곳으로는 페리에서 내려 남쪽으로 달리다 보면 처음 만나게 되는 유오드크란테(Juodkrante)와 리투아니아령의 가장 남쪽에 들어선 니다(Nida)가 있다. 

페리를 내려 남쪽으로 달려 내려가는 길에는 놀랍게도 모래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이곳이 사주가 맞나?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위의 지도에서 보았듯이 페리에서 내리면 숲이 계속 이어지는데, 이 숲 사이로 뚫려 있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도록 되어 있다. 우거진 숲 사이로 나 있는 도로... 드라이브코스로도 나무랄 데 없을 만큼 환상적이다.  

이렇게 환상적인 숲길을 달려 그대로 위에서 열거한 곳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웬걸 "쿠르슈 사주 국립공원(Curonian Spit National Park)" 관리사무소가 우리를 막아선다. 쿠르슈 사주 국립공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쿠르슈 사주는 그 특유의 건강성을 잃게 되었고, 병들어 가는 쿠르슈 사주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관리'의 개념이 생겨 나는데 이것에는 필연적으로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된다. 하여 쿠르슈 사주 국립공원은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입장료를 징수하기 시작했는데, 입장료는 리투아니아 전체의 물가 수준에 비해 상당히 비싼 편이다(우리 가족 3명 + 자동차의 입장료는 3만 원 정도. 2018년 기준).    



#### 넷째 마당: 유오드크란테(Juodkrante)



유오드크란테(Juodkrante)는 클라이페다에서 페리를 타고 쿠르슈 사주로 넘어와서 남쪽으로 달리다 보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마을로, 니다(Nida)와는 별도의 마을이다. 따라서 유오드크란테를 니다 외곽에 있는 니다의 변두리 동네쯤으로 설명하고 있는 여행안내 책자들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1. 마녀의 언덕(Hill of Witches)


유오드크란테에서 가장 볼만한 곳으로 많은 (유럽) 여행객들은 마을 중앙에 있는 "마녀의 언덕(리투아니아어로는 Raganu Kalnas)"을 꼽고 있다. 그런데 리투아니아어에 익숙하지 않은 관광객들이 운전 중에 Raganu Kalnas라고 적힌 표지판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아래 사진 속의 마녀 조각에 주목하는 것은 어떨까? 대로변에 보이는 저 마녀의 조각이 바라다보고 있는 방향, 그곳이 마녀의 언덕이니 말이다.

'마녀의 언덕'이란 이름은 무언가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사실이지만,  마녀의 언덕의 실체는 숲 속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조금 걸어올라 만나게 되는 (나무) 조각 공원일뿐이다. 단지 작품의 주제가 조금 무서운(?) 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울창한 숲 속을 조각 작품들을 보면서 천천히 걷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다.  

마녀의 언덕에서 제일 처음 만나게 되는 조각상은 얼굴이 기형적으로 길고, 역설적으로  다리가 지나치게 짧은 모습을 하고 있다. 재미있기는 하지만 리투아니아인들의 전설이나 그들이 생각하는 마녀의 모습을 전혀 모르니 저들 조각 작품들이 어떠한 것을 모티브로 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찌 되었든 간에 위의 작품을 시작으로 해서 언덕 전체를 이들 나무조각이 뒤덮고 있는데, 하나같이 약간은 기괴한 모습들을 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꼬챙이에 꽂혀 있는 물고기의 모습에서 문득 과메기 모습이 떠올라 찍어 둔 것인데, 이 글을 쓰다 보니 작품 아랫부분에 마녀의 언덕( Raganu Kalnas)이란 글자가 선명한 것이 눈에 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나무조각들이 나타나는데, 아래의 두 작품은 우리네 장승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후로는 계속해서 숲길과 나무 조각 작품이 반복되면서 이어지는데, 그러다 보니 그 모습들이 거의 비슷비슷한 모습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 때문에 처음의 몇 개의 작품을 지나치고 나면서부터는 흥미가 조금은 반감되면서 사진기의 셔터에 손을 대는 빈도 또한 현저히 떨어져 갔는데,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끌렸던 작품은 다음과 같다.     

글자를 읽을 수가 없어 많이 답답했기는 했지만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던 작품인데, 뱀에 대한 리투아니아인들의 생각이 어떤지를 알고 있다면 조금은 더 재미있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다. 이런 글을 쓰고 있기는 하다만 리투아니아란 나라에 대해서는 정말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다시금 고개를 든다. 


2. 가마우지와 왜가리의 집단서식지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리투아니아 안내책자의 유오드크란테에 대한 정보는 '마녀의 언덕'이 전부인데, 이에 반해 Trip Advisor에 의하면 유오드그란테의 볼거리 제2위에 가마우지(Cormorant)와 왜가리(Grey Heron) 집단 서식지가 올라 있다. 모래로 뒤덮인 황량한 사주에서 조류가 서식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겠지만, 쿠르슈 사주 중에 숲이 우거져 있는(?) 이곳은 둥지를 틀 수 있는 여건이 되고, 상대적으로 먹잇감도 충분한 것이 이들이 이곳에 집단서식하는 이유가 되는 것 같다. 이미지 출처: Trip Advisor.  


Tip: 가마우지와 왜가리


가마우지와 왜가리에 해당하는 영어인 Cormorant와 Grey Heron이란 단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났는데, 안내판을 읽다 보니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문이 생겨났다. 


첫 번째 의문은 Cormorant 앞에 붙어 있는 'Great'란 수식어 때문에 생겨났다. 왜냐하면 영어 사전을 찾아보니 "Great Cormorant"가 민물가마우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Great에 민물이란 뜻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이번에는 민물가마우지와 바다가마우지를 검색해 보는 도중에 민물가마우지가 바다가마우지에 비해 평균적으로 몸길이가 20cm가량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전적으로 내 추측인데, 민물가마우지가 바다가마우지에 비해 크다(Great)는 점 때문에 아예 "Great Cormorant"가 민물가마우지를 지칭하는 이름이 되어 버린 것 같다. 

두 번째 의문은 바닷가 모래 사주에 어찌하여 바다가마우지가 아니라  '민물' 가마우지가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을까?라는 것이었는데, 역시 전적으로 내 생각이지만 석호(Lagoon)의 염도가 낮아서 민물과 유사한 환경을 제공해 준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안내판 하단에 민물가마우지와 왜가리의 모습이 보여 사진을 남겨 두기로 한다.    

Trip Advisor에 수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남겨 놓고 있는데, 대부분 민물가마우지 사진이고 왜가리 사진은 거의 없다. 아, 왜가리의 집단 서식지는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발견되는데, 그 가운데 나보고 한 곳을 추천하라고 한다면 독립운동가인 석오 이동녕(石吾 李東寧, 1869~1940) 선생의 생가터를 들 것 같다.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곳에 있는 당신의 생가터 뒤에 엄청나게 넓은 규모의 왜가리 서식지가 있다.      

이동녕 선생 생가터의 왜가리 서식지


3. 마을 풍경 - 조각공원을 중심으로...


유오드크란테는 10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이지만 워낙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기 때문에 마을의 분위기는 활기가 넘쳐나고, 이로 인해 꽤 큰 마을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쿠르슈 석호(Kursih Lagoon)를 따라 잘 정비되어 있는 산책로와 중간중간에 보이는 호텔이나 펜션, 그리고 박물관 등을 보고 있노라면 심지어 고급 휴양도시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한마디로 석호를 따라 조성된 산책로를 걷다가, 힘들면  벤치에 앉아 동행들과 이야기 꽃을 피우며 잠시 쉬기엔 그만인 평화스러운 마을이다.

한편 호수를 따라 조성되어 있는 산책로의 중간중간에는 한 작품을 보고 몇 발자국만 떼면 또 다른 작품들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석조) 조각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덕분에 산책로를 따라 걷는 내내 심심할 틈조차 없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여기가 조각공원(Sculpture Park)이랜다. 이처럼 많은  작품 가운데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제일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이것이었다. 

모습도 그렇지만, 셋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 메뚜기를 생각나게 했던 작품이다. 완전히 기억 속에서 사라진 줄로만 알았는데, 이것을 보는 순간 메뚜기가 머리 - 가슴 - 배의 3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하시던 중학교 시절의 생물 선생님이 생각나서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근 50년 전의 이야기가 유오드크란테에서 다시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를 줄이야 내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 박혀 있는 쇠몽둥이(?)들은 여지없이 메뚜기의 다리와 날개모습이다.

이 작품은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내 카메라 속으로 들어오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인데, 그 제목은 너무나도 거창하게 '물의 세 가지 형태'이다. 조각공원답게 이곳의 작품들에는 예외 없이 작가와 작품의 제목이 리투아니아어와 영어로 붙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그를 사진으로 남겨 놓지 않았다.  


사실 그것이 조각이 되었던, 회화가 되었든 간에 미술 작품을 대할 때면 언제나 하는 나만의 루틴이 있다. 그것은 (1) 먼저 (작품에 대한 사전정보가 되는 작가와 작품의 제목을 보기 전에) 작품을 가까이서 또 멀리서 바라보고, (2) 다음으로 작가가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를 상상하면서 작품의 제목을 유추하여 본 다음 (3) 그러고 나서  사진 촬영이 허용되는 곳이라면 작가와 작품의 제목을 찍어 놓는 것의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 유오드크란테 조각공원에서는 이례적으로 그 세 번째 과정이 생략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찌하여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는데, 다만 그 과정을 생략할 만큼 내가 무엇인가에 홀려 있었다는 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조각공원이 끝나는 곳부터 조금은 시끌벅적했던 마녀의 언덕이나 조각공원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유오드크란테를 맛볼 수 있다. 여기서부터는 흥청거림은 사라지고 전형적인 한적한 호숫가 마을의 모습을 보여 주는데, 이 또한 유오드크란테의 매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시간이 정지된 듯한 장면에 취해 있다가 그 증거로 한 장의 사진을 남긴다. 


현지에 있을 때는 이 장면을 보면서 신인상주의의 대표적 화가인 폴 시냑(Paul Signac, 1863~1935)이 떠올랐었는데, 지금 사진을 보며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시냑보다 근 반세기를 먼저 살아간 외젠 부댕(Eugene Boudin, 1824~1898)의 작품들이 생각이 난다.  이런 것을 보면 그림이나 사진들은 언제 어디서 그것을 보는지, 또 그것을 바라볼 때의 기분은 어떠했는지에 따라 전혀 다르게 와닿는다는 말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호숫가의 풍경이 예상치 못하게 아름답고, 그에 더하여 시골마을의 여유로움과 평화로움까지 안고 있어 꽤 오랜 시간을 걸었다. 그런데 걷고 있을 때는 전혀 못 느꼈었는데, 막상 걸음을 멈추니 갑자기 시장기가 엄습해 온다. 그리고 마치 그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자그마하지만 깨끗해 보이는 호텔과 그에 딸린 레스토랑이 눈에 들어왔다. 

레스토랑의 메뉴는 생각보다 그리 다양하지 않았다. 그 가운데 내가 택한 메뉴는 홍합(?)찜 + 감자요리인데, 맛도 있고 가성비도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족들이 각자의 메뉴를 선택한 이후 주위를 둘러보니 현지인들이  하나같이 똑같은 soup을 맛나게 먹고 있어서 공동 메뉴로 그를 추가로 주문했는데, 이건 그리 훌륭한 선택은 아니었다. 새우도 한 마리 보이고, 곡물가루도 보이고, 그에 더하여 플레이팅도 뭐 보아줄만 했는데, 문제는 맛이 무언가 어설펐다. 



##### 다섯째 마당: 니다(Nida)와 파친티니스(Pažintinis) 모래 언덕




1. 파친티니스(Pažintinis)



쿠르슈 사주 중에서도 모래 언덕이 가장 넓게 형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곶과 바다가 잘 어우러져 최고의 주변 풍광을 갖춘 곳은 파친티니스(Pažintinis)인데,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은 니다(Nida)이다. 한편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많은 안내책자는 마치 니다란 마을의 뒤편에 쿠르수 사주가 있는 것처럼 서술해 놓고 있는데, 이건 앞뒤가 완전히 뒤바뀐 설명방식이다.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하거니와 니다는 쿠르슈 사주의 어느 한 지점에 있는 작은 마을에 불과할 뿐이다.    


파친티니스는 페리에서 내려 남쪽으로 차를 몰아가다 보면 니다보다 근 10여 킬로미터 전에 있다. 문제는 도로변에는 파친티니스를 알리는 커다란  표지판이 없다는 것, 그래서 웬만큼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아래 사진과 같은 주차공간을 그냥 지나치기 쉽다는 것이다. 사실 Pažintinis로 시작하지 않고 모래 언덕을 뜻하는 리투아니아어인 "NAGLIU"로 시작하는 표지판을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발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찌 되었거나 이 표지판을 한가롭게 바라볼 수만 있다면 파친티니스를 제대로 찾아온 것인데, 안내판상의 유일한 영어인 "self-guided path"라는 말이 조금 섬찟하다. 세상에나 "가이드해 줄 사람은 없소. 그렇지만 바닷가 모래 언덕까지 가는 길은 맞소. 그러하니 알아서 걸어갔다가 오쇼"라니... 참 진절한 리투아니아 사람들이다. 

아, 저 표지판이 있는 길로 들어선다고 하여 모래 언덕이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그저 이런 숲길과 마주치게 될 뿐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숲길을 조금만 걸어가면 모래언덕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곳의 모래 언덕의 폭만 해도 3km이니, 제발 부탁하건대 모래언덕이 언제부터 시작하느냐고 보채지는 말기를... 

숲길을 지나쳐 나오면, 비로소 모래가 슬슬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는데, 모래 한가운데로 눈에 보이는 곳까지 나무 path가 깔려 있다. 사실 이곳도 모래 언덕의 일부인데, 양옆으로 나무들이 듬성듬성 보이고, 저 멀리까지도 모래 위를 식물이 뒤덮고 있어서 아직은 모래 속으로 들어와 았다는 실감은 나지 않는다.   

위 사진 속에 보이는 가장 먼 곳, 그러니까 하늘과 맞닿은 곳에 이르게 되면, 이제 모래를 덮고 있던 최소한의 식물조차 완전히 그 자취를 감추고 온전히 모래만이 눈에 그득해진다. 사진 속에 나무 막대기가 두 줄로 연이어져 세워져 있는 것이 보일터인데, 이 두 줄의 막대기는 (1) 이 길이 지름길이라는 것, 그리고 (2) 나무 막대기 바깥은 위험하니 더 이상 나가지 말라는 경고를 의미한다.  

물론 막대기들이 꽂혀 있는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밖으로 나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두 줄의 의미를 쉽게 이해시키고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중간중간에  "밖으로 걸어 나가지 마시오"라는 의미가 뚜렷이 드러나는 다음과 같은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해 두거니와 막대기 바깥 지역은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곳이니 절대!! 나가면 안 된다. 

쿠르슈 사주처럼 모래 언덕이 높고 폭도 넓으며(최대 4km) 이에 더하여 길이 또한 수십 km에 이를 정도가 되면,  막상 그 모래언덕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내가 모래 '언덕' 위에 있다는 느낌은 사실상 사라지고, 그를 대신해 사막 한가운데에 내가 내팽개쳐져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오직 한 가지, 모래뿐이니까 말이다. 


모래언덕뿐인 이곳은 동식물의 서식환경이 아주 열악하다. 일조량은 많고, 바람은 강하며, 그에 더하여 물까지 한 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아온 동식물들은 이곳에서 생존할 수가 없다. 이런 이유로 이곳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희귀한 동식물들이 서식하기 마련인데, 아래 사진은 이곳에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에 대한 안내판이다.

모래 언덕 안으로 들어서게 되면 그저 빨리 이곳을 벗어나 바다를 보고 싶은 생각만 그득하게 되고, 그래서 발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무심코 뒤를 돌아다보았는데, 처음 이곳에 들어설 때 만났던 숲, 그리고 그 숲 너머로 쿠르슈 석호 반대편의 발틱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잠시나마 피곤을 잊게 해 줄 만큼 장관이다.  

그리고 또 정말 모래 속을 한참 걸었고, 그저 한 걸음을 떼놓기에도 힘들 만큼 내 체력이 거의 바닥날 즈음 거짓말처럼 쿠르슈 석호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걷기 시작한 때로부터 1시간 20분여의 힘든 여정 끝에 보는 Lagoon의 모습은 너무도 환상적이었는데, 아마도 그건  모래사막을 마침내 가로질러 이곳에 이르렀다는 성취감이 함께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석호가 보이는 모래 언덕에 안내지도가 하나 서 있다. 안내지도 정 중앙 맨 앞에 P가 보일 텐데, 그곳이 도로변의 주차장이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초록색 줄이 석호까지 이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걸어 들어온 길이다. 보다시피 길의 초입에는 숲이 약간 있고, 그를 지나치면 황량한 모래언덕이 이어지는 구조를 띠고 있다. 그리고 안내지도의 정중앙에 보이는 붉은색 바탕에 하얀 글씨가 써져 있는 곳이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다.

여기까지 왔다면 모래언덕과 석호가 직접 만나 연출하는 모습도 보고, 사진기 속에 그 모습을 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그러나 또다시 나무 막대기가 우리의 발길을 막아선다. 결국 저기서부터는 위험지역이라는 얘긴데, 이는 우리가 지금 서있는 이곳이 모래언덕과 석호의 모습을 안전하게 함께 바라볼 수 있는 맨 앞부분이라는 얘기가 된다. 이젠 햇살 부서지는 사막을 되짚어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아, 쿠르슈 석호를 배를 타고 즐길 수 있는 유람선도 있다는데, 나는 그것을 타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Trip Advisor에 유람선에 올라 석호 쪽에서 쿠르슈 사주를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 떠 있어서 가져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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