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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달음의 샘물 Mar 23. 2024

스탠다드 팝의 여왕 "패티 페이지Patti Page"

50년 전에 만났지만, 다시 듣고 싶은 "Changing Partner"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미국 여가수 패티 페이지(Patti Page, 1927~2013)를, 아니 그녀의 노래를 좋아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세상을 살아갔던 미국 여가수가 1950년대에 부른 노래들을 어린 시절의 내가 도대체 어떻게 알고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참 불가사의한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긴 하지만 근자에는 패티 페이지의 음악을 찾아 듣지는 않았다. 그런데 칼립소의 대가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 1927~)를 이야기하다 보니 저절로 그녀가 다시 떠올랐고, 이에 촉발되어 패티 페이지란 가수와 그녀의 노래에  대하여 간단히 이야기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 패티 페이지, 그녀는 누구인가?


패티 페이지(Patti Page,  1927~2013, 본명: Clara Ann Fowler)란 가수를 잘 모르는 분들이 있을지도 몰라서 잠깐 그녀를 소개해 볼까 한다. 그녀의 젊은 날의 사진인데, 빼어난 미모라고 까지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충분히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사진출처: http://vintagebandstand.blogspot.com/2015/12/guest-reviewer-patti-pages-new-box-set.html?m=1

패티 페이지는 1927년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태어났는데, 그녀의 나이 불과 18살 때인 1945년에 라디오 프로그램에 초대되어 노래를 부를 정도로 일찍부터 천재성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다음 해인 1946년에는 Jimmy Joy Band의 정식 멤버가 되었고, 1947년에는 Mercury Record社와 음반 계약을 체결한다. 그리고 그녀의 나이 21살이 되던 1948년 싱글 앨범 Confess를 내며, 솔로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패티 페이지는 1950년대 초반 연이은 히트곡을 터뜨리며 스탠다드 팝의 대명사로 떠오른다. 그리고는 이러한 성공을 기반으로 1960년 리처드 브룩스(Richard Brooks) 감독이 연출한 영화 "엘머 갠트리(Elmer Gantry)"에 캐스팅되며 영화배우로도 데뷔를 한다. 물론 그 이후로도 음악활동을 이어 갔고,  이미 40줄에 들어선 1970년대 초반에 과감하게 컨트리 음악으로 방향을 전환해서는 빌보드 싱글차트 20위권에 꾸준히 오르내리는 음악적 역량을 과시한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그녀의 활발한 음악활동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그렇지만  패티 페이지는 그렇게 소리 없이 스러져가지는 않았다. 1998년, 스태다드 팝의 여왕답게 패티 페이지는 71살의 나이로 카네기 홀에서 데뷔 50주년을 맞는 기념 콘서트를 열며 노익장을 만천하에 과시한다. 그리고 이 콘서트의 공연 실황을 담아 발매된 라이브 앨범 'Live At Carnegie Hall: The 50th Anniversary Concert'는 1999년 제41회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트래디셔널 팝 보컬 퍼포먼스'를  수상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한다.


이 마지막 불꽃을 끝으로 패티 페이지는 차츰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 가게 되지만, 2013년 2월에 열린 제55회 그래미상의  ‘평생 공로상’ 수상자로 결정되며 다시 화제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녀는 시상식 무대에 오르지는 못했다. 시상식 한 달 전인 2013년 1월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한 요양원에서 86세를 일기로 노환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2. 패티 페이지의 음악(1) - 내가 다시 듣고 싶은 그녀의 노래들


이제 패티 페이지를 그녀의 음악을 통해 조명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기로 하겠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패티 페이지가 가수로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48년의 일인데,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팝음악으로는 최초로 오버덥(Overdub) 방식으로 제작된 그녀의 데뷔 싱글 "Confess"는 빌보드 싱글차트 12위에 오르며 그녀의  음악적 성공을 보장하는 초석을 놓는데, 비록 우리에게 익숙한 노래는 아니지만 21살의 어린(?) 패티 페이지의 청아한 목소리가 돋보이는 "Confess"를 한번 들어 보자.

1948년의 데뷔 싱글 "Confess"가 그녀의 음악적 성공을 예감케 했지만, 그것은 그녀의 찬란한 성공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패티 페이지는 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곡들을 연이어 히트시키는데, 그 서막을 열어젖힌 것은 1950년에 발표되어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오른 "All My  Love(Bolero)"였다. 놀라운 것은 데뷔한 지 불과 2년이 흘렀을 뿐인데, 어느새 그녀의 노래엔 여유와 관록이 묻어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그녀로 하여금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도록 해준 "All My  Love(Bolero)"이다. 

"All My  Love(Bolero)"의 빅 히트 이후부터 그녀의  음악적 행보는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거침없이 내달린다. 그리고 1950년의 마지막 날에, 그녀의 노래 중 또 한곡이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오르며 1951년도 한해 내내 불리는데, 그 곡이 바로 "Tennessee Waltz"이다. 

테네시 월츠 재킷.  사진출처: https://m.blog.naver.com/jcs89225/222356858249

1965년에 테네시주의 주가(州歌)로 선정되기도 했던 "Tennessee Waltz"이다.

1951년에 자신이 좋아하는 민요들을 재해석한 첫 번째 앨범 'Folk Song Favorites'를 출시하면서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하더니, 패티 페이지는 1952년 다시 "I Went To Your Wedding"으로 가볍게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느릿느릿, 읊조리듯이 부르는 이 노래, 결코 그냥 넘길 수 없는 그녀의 대표적 넘버이다.

그리고 1952년에 발표한 "(How Much Is) That Doggie In The Window?"는 해를 넘겨 1953년에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오르는데, 아마도 개 짖는 소리가 레코딩된 첫 번째 곡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제목은 생소해도 그 노래만은 꽤 익숙한 곡,  "(How Much Is) That Doggie In The Window?"이다.

1953년에는 패티 페이지가 발표해서 빌보드 싱글 차트 3위에까지 올랐던 "Changing Partners"가  빅 히트를 하는데, 그녀의 수많은 히트곡 가운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바로 이것이다.  아마도 중학교에 들어가 영어를 접하게 되면서 알게 된 영어 가사의 내용에 되지도 않게 푹 빠져버렸던 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 싶은데, 빛바랜 사진이 되어버린 중학생 시절을 떠올리며  "Changing Partners"를 다시 들어본다. 가사의 내용을 다시금 음미하면서 말이다.

1954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녀의 곡들과는 분위기가 너무도 많이 다른  노래 "Cross Over The Bridge"가 발표되며 빌보드 싱글 차트 2위에 오른다. 리듬도 연주도 독특하고, 그녀 이외의 다른 목소리가 튀어나오기도 하는 등 재밌는 구성이 돋보이는 이 노래. 안 듣고 넘어가면 많이 섭섭하다. 



3. 패티 페이지의 음악(2) -나도 모르는 그녀의 노래들.


솔직히 내가 알고, 또다시 듣고 싶은 곡은 여기까지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쓰다 보니 패티 페이지의 음악 작업은 그녀의 나이 40대 중반에 달하는 1970년대 초반까지 활발하게 이어졌고, 그런 작업의 결과물인 그녀의 노래 또한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부터는 이런 그녀의 노래들을 시대별로 간단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1) 1950년대

패티 페이지는 1956년 작곡가이자 편곡자인 빅 쉔(Vic Schoen, 1926~2000)을 만나면서 "Allegheny Moon"(1956년 빌보드 싱글차트 2위), "Old Cape Cod"(1957년 빌보드 싱글차트 3위) 등의 싱글을 히트시켰을 뿐만 아니라, 1956년 빌보드 앨범차트 18위에 오른 앨범 'Manhattan Tower'를 출시하기도 했다. 다만 익숙한 노래들이 아니다 보니 그 감응은 크지 않던데, 그 가운데 내 귀에 편하게 들리는 것은 "Allegheny Moon"이었다.


(2) 1960년대

1960년대에도 그녀는 "Most People Get Married"(1962년 빌보드 싱글차트 27위), "Hush, Hush, Sweet Charlotte"(1965년 빌보드 싱글차트 8위) 등의 싱글을 히트 시킨다. 사실 빌보드 싱글 차트 20위권에 2곡을 진입시켰다고 하면, 대성공이란 표현을 써도 무방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곡을 부른 이가 패티 페이지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는데, 그것은 이 정도를 가지고 대성공이라고 호들갑을 떨기엔 그녀의 과거가 워낙 화려했기 때문이다. "Hush, Hush, Sweet Charlotte", 이런 분위기의 곡이다.


(3) 1970년대

패티 페이지는 1970년대 초반에 자신의 음악적 방향을 스탠더드 팝/컨트리 팝에서 컨트리 음악으로 바꿔 버린다. 중년에 들어서면서 음악적 방향을 완전히 전환한 것인데, 컨트리 음악으로서도 나름 어필을 한다. "I Wish I Had A Mommy Like You"(1970년 빌보드 컨트리 싱글차트 22위), "Give Him Love"(1971년 24위), "Hello We're Lonely"(1973년 14위) 등의 컨트리 노래가 이렇게 연이어 히트하니 말이다.


(4) Jamaica Farewell

패티 페이지가 부른 노래 중에 그녀의 노래가 갖는 전반적 분위기와는 조금은 이질적인 곡이 있는데, "Jamaica Farewell"이 그것이다. (그녀의 다른 곡들에 비해) 빠른 템포로 진행되고 밝은 분위기를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목에서 풍기는 것처럼 카리브해 냄새가 물씬 나는 곡인데, 내가 어릴 적부터 참으로 좋아했던 노래이다.


이처럼 좋아했던 노래 "Jamaica Farewell"을 패티 페이지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에야 비로소 언급하는 이유는,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 곡은  칼립소의 대가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 1927~2023)가 1956년에 발표한 곡의 Cover곡이기 때문이다. 패티 페이지 버전으로 들어보는 "Jamaica Farewelb"이다.

내가 언급한 곡들을 포함해서 그녀가 발표한 모든 곡들이 잘 정리되어 있는 사이트가 있는데, 패티 페이지의 음악이 궁금하다면 아래 사이트에 접속해 보기를 바란다: Patti Page - MusicBrainz

아, 패티 페이지는 1963년에 내한 공연을 가지기도 했는데, 당시의 공연상황을 보도한 신문을 가져와 봤다. 신문 기사가 재미있기도 하고, 표현이 생소하기도 해서 말이다. 기사 중에 보이는 매옥의 가희(歌姬), 만당갈채(滿堂喝采) 등은 이제는 거의 쓰지 않는 표현이 되어버렸다.

패티페이지 내한공연 기사 1(조선일보 1963년 5.19일 자)
패티페이지 내한공연 기사 2(동아일보 1963년 5.18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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