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영화 "Bohemian Rhapsody"는 대한민국에 그룹 퀸(Queen)의 열풍을 몰고 왔다. 둘이 모이던 셋이 모이던간에, 그 장소가 술집이든 카페이든 간에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Queen을 이야기했다. Queen의 음악을 들었고, Queen의 핵심 멤버였으나 1991년 에이즈로 일찍 세상을 등진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 1946~1991)의 삶을 화제로 삼곤 했다. 단 한편의 영화가 이리도 강렬한 후폭풍을 몰고 와서 완벽한 신드롬(Syndrome)을 만들어 냈던 적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해 가을 Queen은 대한민국을 온전히 지배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으로는 여러가지가 거론되고 있지만, 그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뭐니뭐니해도 Queen의 음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Queen의 음악적 특성은 동시대에 활동했던 다른 밴드들과 다르게 특정 장르에 얽매이지 않으며 음악적 다양성을 추구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때문에 평론가들로부터는 뚜렷한 음악적 성향을 보이지 못했다는 것을 이유로 평가절하되기도 했다. 이처럼 사람들의 평가가 갈리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1970년대를 넘어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불후의 명곡을 쏟아 내었던 Queen과 그의 음악을 지금부터 이야기 해 보기로 한다. 이야기에 앞서 일단 영화의 제목이기도 했던 "Bohemian Rhapsody"를 들어 보자.
2. Queen의 결성
잘 알고 있다시피 Queen의 모체는 1968년에 Imperial College London의 학생이었던 브라이언 메이(Brian May, 1947~)와 팀 스태플(Tim Staffel, 1948~)이 드러머 로저 테일러(Roger Taylor, 1949~)를 맞아들이며 결성한 스마일(Smile)이다. 아래 사진은 스마일 시절의 로저 테일러, 브라이언 메이, 그리고 팀 스태플이다.
이 스마일에 1969년에 파로크 불사라(Farrokh Bulsara), 즉 프레디 머큐리가 가세하면서 1970년에 비로소 Queen이란 이름의 밴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음악적 견해 차이로 팀 스태플이 탈퇴하면서 밴드의 모습에 균열이 나타났던 바, 결국 1971년에 존 디콘(John Deacon, 1951~)이 가세하면서 드디어 Queen의 라인 업이 완성된다. 이런 사정 때문에 Queen 스스로 라인업이 완성된 1971년을 Queen의 공식적인 결성연도로 보고 있으며, 10주년과 20주년 기념음반인 Greatest Hits와 Greatest Hits Ⅱ 또한 각각 1981년과 1991년에 발매하였다.
아, Queen의 멤버들에 관한 이야기 중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들 모두가 상당히 고학력(?)의 소지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즉, 브라이언 메이는 세계적 명문인 Imperial College에서 천체물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던 재원이었고, 드러머인 로저 테일러는 치과대학을 다니고 있었으며, 가장 늦게 합류한 베이시스트 존 디콘 또한 Kings College의 전자공학도였다. 그리고 프레디 머큐리 역시 당시에 꽤 유명했던 미술대학인 Ealing College의 미술학도였다. 그리고 이들은 그에 걸맞게 1973년까지는 학업과 음악을 병행하였는데, 아래 사진이 1971년에 라인업이 완성된 Queen의 멤버들이다. Sign이 있어 불필요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왼쪽부터 브라이언 메이, 존 디콘, 로저 테일러 그리고 프레디 머큐리이다.
3. Queen의 음악
Queen의 음악을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줍잖은 일이니, 여기서는 그저 Queen의 노래를 그들이 발표한 앨범 순으로 한번 쫓아가 보기로 하겠다.
(1) 1집 Queen에서 3집 Sheer Heart Attack까지(1973~1974년)
1971년에 Queen의 라인업이 완성되었다고는 하지만 초창기 Queen의 활동은 이렇다할 것이 없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학업을 병행하였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어쨌거나 Queen은 197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1집 앨범 Queen을 발매하는데, (일부 평론가들로부터 괜찮은 평가를 받기는 하였지만) 적어도 상업적으로는 별로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Queen의 주된 역할은 기껏해야 다른 밴드(Mott the Hoople)의 공연에 앞선 오프닝 밴드가 전부일 정도였다.
그러나 1974년에 들어서면서 Queen은 두장의 앨범을 연이어 발매하고, 서서히 음악계에 자신들만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상반기에 발매한 2집 앨범 Queen II는 어쩌면 Queen의 최초의 힛트 곡으로 기록될 "Seven Seas of Rhye"가 담겨 있었는데 상업적으로 어느 정도의 성과를 올리기 시작했고, 이어 발표한 싱글 "Killer Queen"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편 히트곡이라 불릴만한 싱글은 없었지만 3집 앨범 Sheer Heart Attack도 나름 괜찮은 반응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래 사진은 퀸 2집 Queen II의 재킷사진이다.
여기서 "Seven Seas of Rhye"와 "Killer Queen", 이 두 곡을 들어 보기로 하겠다. Queen의 음악을 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 익숙한 곡은 아니지만, 젊은 시절의 Queen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한번 보아 둘 가치는 있으니 말이다.
"Seven Seas of Rhye"이고,
"Killer Queen"이다.
(2) 4집 'A Night At The Opera '(1975년)
2-3집 앨범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소속사인 트라이던트와의 노예계약(?)으로 여전히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Queen은 존 리드(John Reid)를 통해 EMI와 직속 계약에 성공하면서, 1975년에 4집 앨범 'A Night At The Opera'를 발매한다. 그리고 이 앨범의 리드 싱글이자 순수 연주시간만 무려 6분에 걸친 대곡 "Bohemian Rhapsody"는 영국 차트 1위, 미국 빌보드 차트 9위에 오르는 대성공에 이른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Queen은 세계적 지명도를 얻게 되고, 밴드로서 한걸음 더 도약하게 된다.
퀸 4집 A Night At The Opera 사진출처: https://www.pinterest.co.kr/pin/630011435391367553/
아, 4집 앨범 'A Night At The Opera'에서는 "Bohemian Rhapsody"에 이어 또하나의 싱글이 인기를 얻는데, 그것이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Love Of My Life"이다.
(3) 5집 A Day At The Races(1976년)
4집 앨범의 대성공을 뒤로 하고 다음 해인 1976년에 Queen은 5집 'A Day At The Races'를 발매하는데, 이 앨범에 대해서는 전작에 기대었을 뿐 새로운 시도로 볼 수 있는 요소가 없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비록 프레디 머큐리가 작곡한 "Somebody to Love"가 나름 인기를 끌기는 했지만, 지나치게 정형화되었다는 평가와 함께 5집 앨범 'A Day At The Races'는 조용히 사람들의 머리속에서 잊혀져 간다. 그렇긴 하지만 "Somebody to Love"는 꽤 친숙한 곡이니, 한번 들어보기로 하겠다.
(4) 6집 News Of The World(1977년)
5집 앨범 'A Day At The Races'는 Queen의 명성에는 걸맞지 않은 흥행 성적을 올리며 실패한 앨범(?)이 되어 버린다. 이에 Queen은 자신들의 음악적 부활을 세상 사람에게 알리기 위하여 절치부심하게 되는데, 그같은 뼈를 깎는 노력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 6집 앨범 'News Of The World'이다.
퀸 6집 News Of The World . 사진출처: https://www.pinterest.co.kr/pin/39125090505007395/
6집 앨범 'News Of The World'는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두는데, 이 앨범에는 우리가 Queen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불멸의 히트곡 2곡이 담겨져 있다. Queen 스스로도 이 곡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데, 이는 Queen이 자신들의 라이브 공연 엔딩 곡으로 거의 예외없이 이 두곡을 선택한다는 것으로도 여실히 증명된다. 그 두곡. 제목만으로도 우리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그 두 곡은... 예상했겠지만 바로 "We Will Rock You"와 "We Are The Champion"이다.
먼저 "We Will Rock You"는 Queen의 대표곡 중의 하나로 다른 말이 필요없을 정도로 유명한데, 전세계인들이 이 곡을 대부분 알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이른바 '쿵쿵따' 리듬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라이브 공연시 관객들의 발구름과 손뼉은 자연스레 공연 열기를 Up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발을 구를 준비가, 손뼉으로 화답할 준비가 되었는가? 그렇다면... 렛츠 고! "We Will Rock You".
"We Are The Champion" 역시 내가 무어라 이야기하는 것이 사족이 될만큼 유명한 곡으로 어쩌면 Queen의 수많은 히트 곡 중에서 TV 등의 매체를 통해 가장 자주 듣게 되는 곡이라고 할 수 있다. 가사의 내용과 제목 때문에 각종 스포츠 경기가 끝난 후 열리는 시상식에는 거의 '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이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으니 말이다. 특히 나는 일년에 적어도 수백번은 이 노래를 듣고 있는데,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스포츠 기자가 꿈이었을만큼 거의 모든 스포츠에 광적이었던 관계로 여전히 내 자유시간의 거의 모든 부분을 스포츠 중계에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 이번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스포츠 스타가 시상대 맨 윗단에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들어보자. "We Are The Champion"을...
(5) 7집 Jazz(1978년)
4집 앨범 'A Night At The Opera'의 대성공 이후 5집 앨범이 그러했듯이, 6집 앨범 'News Of The World'의 빅히트 후 다음 해인 1978년에 발매한 7집 앨범 'Jazz'는 거의 참패라고 할만큼의 암담한 결과를 낳는다. 평론가들의 반응은 지극히 냉담했으며, 상업적으로도 앨범판매량은 종전의 3분의 1이하로 급전직하 한다. 물론 프레디 머큐리 사후에 그가 작곡한 "Don't Stop Me Now"가 잠시 세간의 주목을 끌기는 했다.
(6) 8집 The Game(1980년)
7집 앨범 Jazz의 참담한 실패 이후 Queen은 이미지 변신을 꾀하며 오랜 기간동안 새로운 음반작업에 몰두하게 되는데,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8집 앨범 'The Game'이다. Queen은 The Game을 통하여 여러가지 면에서 파격적인 시도를 행하였는데, 음반제작에 신디사이저가 도입되고, 펑크를 지향하는 듯한 사운드로 변화를 꾀한 것이 그것이다. 어쩌면 Queen의 음악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소한 음악인데, 놀랍게도 이 앨범은 빌보드 앨범차트 1위에 오른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Queen의 음악적 다양성이 또 다시 한번 새로이 조명을 받게 된다.
퀸 8집 The Game. 사진출처: https://en.m.wikipedia.org/wiki/The_Game_(Queen_album)
뿐만 아니라 이 앨범에서는 무려 두곡이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오르는데, 그 하나는 "Another One Bites The Dust"이고, 또 다른 하나는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이다. 빌보드 차트 1위에까지 올랐다고 하니, 여기서 두 곡을 연속해서 들어보기로 하자. 뮤직 비디오에 여성 댄스가 등장하는 등 생경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는 역시 너무도 친숙하기만 한다.
먼저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이고,
이어지는 이 노래가 "Another One Bites The Dust"이다.
(7) 9집 Flash Gordon과 10집 Hot Space(1980년~1982년)
Queen은 1980년에 또 한장의 정규 앨범을 발매하는데, 그것은 SF 영화 Flash Gordon의 OST 앨범이었다. 그리고 이 앨범 속의 "Another One Bites The Dust"의 성공에 고무받아 1982년 펑크 음악에 물든 10집 앨범 'Hot Space'를 내놓는데, Queen의 냄새가 사라진 이 앨범은 팬들로부터 완전히 외면을 받았고, 그렇게 Queen의 앨범에 있어 흑역사로 단명하는 비운의 앨범이 되고 만다. 그나마 "Under Pressure"가 조금 들어 본 듯하다.
(8) 11집 The Works(1984년)
10집 앨범 Hot Space의 처절한 실패를 바라 본 많은 사람들은 이제 Queen에게 더 이상의 음악적 성취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설명을 곁들여 Queen의 몰락을 예고하였다. 실제로 Queen은 무려 2년간 음악 활동을 사실상 접은 채, 은둔의 길로 접어든다. 그러나 그것은 또 하나의 폭풍전야였고, 2년의 침묵을 깨고 발표한 11집 앨범 'The Works'는 영국 앨범차트 2위에까지 오르는 등 또 한번의 빅 히트를 기록한다.
퀸 11집 The Works. 사진출처: https://queen4everblog.blogspot.com/2013/10/capitolo-24-works.html?m=1
뿐만 아니라 이 앨범에 수록된 싱글 "Radio Ga GA"는 무려 19개국에서 싱글 차트 1위를 휩쓸면서, 그들의 80년대 곡 중 최고의 히트 곡이 되었다.
이에 더하여 "I Want To Back Free"가 영국 싱글 차트 3위에, 그리고 "It’s A Hard Life" 또한 7위에 오르면서 Queen은 완벽하게 부활의 날개짓을 펼친다. 이 가운데 여기서는 "I Want To Back Free"를 들어보기로 한다.
(9) 12집 A Kind Of Magic(1986년) 이후
Queen의 음악 작업은 1980년 중반을 넘어서도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되었는데, 그 신호탄은 1986년에 발매된 12번째 정규 앨범 'A Kind Of Magic'이다. 그리고 12집 발매 후 앨범의 이름을 딴 매직 투어가 이어졌는데, 특히 7월 11일과 12일 이틀간에 걸쳐 행해진 영국 웸블리 공연은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때로부터 프레디 머큐리의 건강 악화로 더 이상의 라이브 공연은 행해지지 않게 된다.
퀸 12집: A Kind Of Magic. 사진출처: https://www.discogs.com/release/15331756-Queen-A-Kind-Of-Magic
그로부터 3년이 흐른 1989년 Queen의 13번째 정규 앨범 'The Miracle'이 발매되는데, 멤버 4명의 얼굴이 연이어지는 앨범 재킷(아래사진) 자체가 '기적'을 생각나게 만들었던 것이 기억난다. 이 앨범의 가장 큰 특징은 일부 곡들의 경우 작곡가의 이름을 공동명의(Queen)로 바꾸었다는 것인데, 1980년대 Queen의 앨범 중 음악성에서는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것을 자각한 프레디 머큐리는 더욱 더 음악에만 전념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는 1991년에 발매된 14집 앨범 'Innuendo'로 나타난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프레디 머큐리는 그의 불꽃같은 삶을 마감한다. 14집 앨범 'Innuendo'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리지만, 적어도 "Innuendo", "The Show Must Go" 및 "I'm Going Slightly Mad" 등은 명곡으로 분류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충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는 듯하다. 유투브에는 특이하게 이 앨범의 전체듣기가 올라 와 있던데, 한번 가져와 봤다. Queen의 새로운 면모를 즐기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으로.
프레디 머큐리는 14집 앨범을 발매한 이후 죽기전까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많은 곡들을 썼고, 그 곡들을 녹음하는 작업도 이어갔다. 그리고 그의 사후 Queen의 나머지 멤버들은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의 녹음을 완성시키기 위한 작업을 계속하여 1995년 'Made in Heaven'이란 이름의 앨범을 발매하는데, 이 앨범이 영국 앨범 차트 1위에 오르며 Queen 음악 여정의 대단원을 장식한다.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퀸14집 Made in Heaven의 재킷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