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7월 27일, 새벽 3시. 가톨릭대학교 성빈센트 병원. 차가운 수술등 아래에서 한 아기가 세상에 울음을 터뜨리며 태어났다. 그러나 그 울음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마치 태어난 그 순간부터, 세상이 그를 조용히 밀어내는 듯했다. 의사는 아이를 받아들고 굳은 얼굴로 침묵했다. 간호사들 사이에 눈빛이 오갔다. 산모는 식은땀을 흘리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제...아이는 괜찮은 거죠?" 의사는 조심스럽게 차트를 들여다보며 설명했다.
“양막대증후군(Amniotic Band Syndrome)으로 보입니다. 임신 중 양막이 찣어지면서, 그 조각이 태아의 손이나 발을 조여 발달을 방해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손가락이 붙거나 자라지 못하고 짧게 멈추는 경우도 있습니다. 발생 확률은 대략 15,000명 중 1명 정도인데...”
산모는 언제 산통을 했냐는 듯 얼굴이 굳어갔다.
“현재 아이의 왼손에는 손가락이 세 개뿐이고 모두 붙어 있습니다. 왼발가락은 다섯 개이지만 마찬가지로 붙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후 수술을 통해 기능 회복이 가능하리라 봅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 산모의 입술이 떨렸다. 침대 옆에 서 있던 남편은 아기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작고 여린 얼굴, 그 자체로는 사랑스러웠지만 그 위로 덧씌워진 ‘다름’이라는 현실이 부모의 숨을 막히게 했다. 며칠 후, 가족들은 아기의 첫 사진을 찍기로 했다. 어머니는 양말 한 짝을 더 챙겼다. 부부는 그것을 아기의 왼손에 조심스레 씌웠다. 그렇게 찍힌 첫 사진. 화면 속 아기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고, 왼손은 작은 흰 양말 속에 감춰져 있었다. 그 손은 지금도 왼쪽 주머니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부모는 아이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신체적 장애를 안고 태어났기에, 부모는 먼저 아이의 지능에 문제가 있을까 노심초사했다. 의사에게 묻고 또 물었다.
"뇌에는 이상이 없는 건가요? 나중에 말도 하고, 공부도 할 수 있는 건가요?"
의사는 걱정 말라며 차분히 설명했다. 하지만 불안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아이가 제대로 걸을 수 있을까 하는 것도 걱정거리였다. 발가락이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붙어있는 손가락과 발가락을 하나씩 떼어내는 수술은 언제 해야 할까. 수술이 잘 되더라도 통증이나 불편함이 남는 건 아닐까. 그러한 걱정은 끝도 없이 펼쳐졌다.
게다가 아이는 심한 아토피로 고생했다. 밤마다 긁어대는 바람에 피부가 헐고, 옷에 피가 묻어나는 날도 있었다. 어머니는 아이가 조금이라도 몸을 덜 긁게 하려고 모든 침구류를 매일같이 삶았다. 더운 여름날이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빨래통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그녀는 매일 아이를 위해 싸웠다. 아이는 밤마다 가려움에 끊임없이 몸을 뒤척였고 그때마다 울며 잠에서 깨어났다. 부모는 번갈아 일어나며 아이를 어르고 달랬다. 부부에게 잠이라는 건 사치처럼 느껴졌다. 이불 속에서 간신히 눈을 붙이다가도 다시 들려오는 앙칼진 울음소리에 벌떡 일어나는 날이 수없이 반복되었다.
장애인. 아이가 세상에서 겪게 될 시선과 차별은 어떻게 이겨내야 할까. 어느날 밤, 부부는 침대 맡에서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우리 아이, 너무 힘든 인생을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우리가 아무리 지켜주고 싶어도 결국 세상은 혼자 살아가야 하니까."
“그러니까 하늘이 도와줘야지. 우리 힘만으로는 부족할 테니까." 남편이 중얼거렸다.
아내는 이불 속 아이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건우. 하늘 건(健), 도울 우(祐). 부모는 이 아이가 살아가는 데 하늘이 조금은 힘을 보태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나의 이름은 ‘건우’로 정해졌다. 하지만 내 이름이 지어지는 순간 그 이름 아래 얼마나 차가운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지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