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HS에서 만화책까지
나는 어릴 적부터 밖에 나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방학이 되도 하루종일 집에만 있던 진성 집돌이였다. 천성적으로 사람 많은 곳을 꺼리는 내향적인 성격 탓이 컸다. 거기에 남 보여주기 부끄러운 장애까지 더해졌으니 집 밖은 내게 낯설고 부담스러운 공간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방학 동안 나는 주로 집 안에서 영화를 보거나 만화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것이 나만의 낙이자 작은 세계였다.
내가 비디오 대여점을 처음 드나들기 시작한 건 아주 어렸을 때, 대략 네댓 살 무렵이었다. 지금은 자취를 감췄지만, 그때만 해도 <영화마을>, <빅뱅> 같은 VHS 비디오와 만화책을 빌려주는 작은 가게들이 흔했다. 집 앞에도 그런 대여점이 있었는데, 나는 그곳을 무척 좋아했다. 특히 디즈니의 <라이온 킹>을 가장 사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티몬과 품바를 좋아했다. 매주 엄마 손을 잡고 가서 같은 비디오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빌렸다. 엄마는 또 그걸 보냐며 혀를 찼지만, 나는 늘 설레는 마음으로 비디오를 품에 안았다. 티몬과 품바가 노래하며 등장하는 장면에선 나도 따라 부르며 거실을 뛰어다녔다. 그 시절의 오래된 간판, 쾌청 테이프, 비디오 가게 특유의 냄새까지 지금도 뚜렷이 기억난다.
조금 더 자라 초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병점으로 이사 간 동네에도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다. 그곳에서도 우리 가족은 다양한 영화를 빌려 보았다. 엄마는 종종 내게 DVD 심부름을 시켰고, 비디오 가게 주인은 내가 15세 관람가 영화를 빌리더라도 “엄마 심부름이에요.”라는 말 한마디면 그냥 내어주곤 했다. 덕분에 우리는 저녁마다 <터미네이터>, <헌티드 힐>, <지퍼스 크리퍼스> 같은 공포영화를 함께 보았다. 영화가 너무 무서워 도중에 화장실에 갈 때면, 등 뒤에서 귀신이 따라오는 듯한 착각에 몇 번이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서우면서도 또 보고 싶어지는 묘한 끌림. 어쩌면 나는 그때부터 ‘이야기’가 주는 감정의 롤러코스터에 매혹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주말이면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TV부터 켰다. OCN, CGV, 슈퍼액션 같은 영화 채널에서 흘러나오는 작품들을 보는 게 늘 일상이었다. 특히 <쇼생크 탈출>과 <그린 마일>은 중간부터 봐도 끝까지 몰입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영화였다. 그때는 이 작품들이 얼마나 위대한 명작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정말 재미있고,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내 유년의 감수성을 길러준 건 교과서가 아니라 바로 이런 영화들이었다.
물론 B급 괴수 영화들도 빼놓을 수 없었다. <딥 라이징>, <불가사리>, <플래시드> 같은 작품들은 늘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나는 숨죽인 채 괴물이 언제 등장할지 기다리곤 했다. 너무 무서워 화장실에 갈 때마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 공포마저 즐거웠다. 그렇게 조조 영화 한 편을 보고 난 뒤 이어지는 공중파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와 ‘출발! 비디오여행’은 내 일요일을 한층 더 알차게 채워주었다.
특히 이 무렵, 우리 엄마는 ‘영화마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셨다. 나는 학원이 끝나면 곧장 엄마가 일하는 비디오 가게로 달려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곳에서 다양한 만화책을 마음껏 빌려 볼 수 있었는데, <우당탕탕 괴짜가족>이나 <갓슈벨>을 읽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반에 꽂힌 <기생수>라는 만화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 생각 없이 1권을 꺼내 읽기 시작했는데, 곧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사자가 동물원을 탈출해 사람을 잡아먹고, 기생수에 감염된 남편이 아내의 머리를 덥석 물어뜯는 장면까지 이어졌다. 소름이 끼쳐 황급히 책을 다시 꽂아 넣었다. 훗날 고등학생이 되어 다시 읽게 된 <기생수>는 명작이었다. 인간과 기생 생물의 경계에 대한 철학적 고찰, 비정과 감정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성. 그 모든 것이 깊이 남아, 지금도 가끔 떠오르면 몇 번이고 다시 꺼내 읽곤 한다.
나의 만화책 사랑은 학창시절 내내 식을 줄 몰랐다. 비디오 대여점에 만 원씩 충전해 두고 만화책을 빌려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얇은 일본 만화 단행본은 권당 300원, 두꺼운 책은 500원 정도였다. 대여 기간은 보통 일주일. 한 번에 다섯 권쯤 빌려 오면 그 주는 걱정 없이 즐거웠다. 방바닥에 엎드려 책장을 홀랑홀랑 넘기며 몰입하는 그 재미, 그 소소한 행복이 지금도 선명하다.
<원피스>는 내 학창시절을 대표하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연재 중이었기에 최신 단행본까지 읽고 나면 몇 달을 애타게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드디어 신간이 만화방 책장에 꽂혀 있을 때의 그 설렘이란! <가정교사 히트맨 리본>, <미스터 초밥왕>, <다다다>, <소년탐정 김전일>, <블리치> 같은 만화들도 즐겨 읽었다. 고등학생이 된 뒤에는 <이토 준지 단편선>이나 <진격의 거인>처럼 조금 더 어두운 세계관의 작품들로 관심이 옮겨갔다.
만화를 책으로 먼저 접해서인지 TV 애니메이션은 내게 잘 맞지 않았다. 전개가 책보다 늘어져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이야기를 앞질러가고 싶어 했고, 그 속도를 맞춰주는 건 늘 책이었다.
교사가 된 뒤에도 나는 수업 시간에 영화를 자주 활용한다. 특히 5학년 2학기 사회 과목은 한국사 단원이라, 역사 영화 한 편이 아이들의 흥미를 끌고 이해를 깊게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학기 말에는 <마틸다>나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을 틀어주기도 한다. 아이들과 함께 명작을 감상하다가, 그 작품에 아이들이 감동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덩달아 신이 난다. 하지만 현실적인 제약도 있다. 교육청을 통해 교실에서 1년에 영화를 몇 편 상영하는지 자료를 제출하라는 공문이 내려온 적이 있었다. 한 국회의원의 이름으로 요청된 일이었다. 왜 이런 걸 조사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나는 워낙 자주 보여준 탓에 제대로 기재하지도 못했다. 어릴 적부터 이어진 영화와 만화의 세계가 지금까지 내 삶의 한 축을 이루고 있지만, 그마저도 숫자로 환산돼야 하는 불필요한 행정 업무의 현실 앞에서는 씁쓸한 웃음이 나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