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삶
오늘의 필사 <더 나은 어휘를 쓰기 위한 필사책>
진은영 시 <남아 있는 것들>
"아침의 기슭엔 면도한 얼굴로 말끔하게 희망이, 오후가 되면
거뭇거뭇 올라오는 수염 같은 절망이 남아 있고 또다시 아침, 부서질
마음의 선박과 원자로들이, 잘 묶인 매듭처럼 반드시 풀리는 나의
죽음이 남아 있고"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 문학과 지성사. 2022년 34쪽
아무리 단단히 묶여 있던 매듭이라 해도 언젠가는 풀리기 마련이다. 죽음도 그렇다.
피할 수 없을 것 같던 숙명이 결국 우리를 찾아오듯, 인생에서 견고하게 엉켜 있던 매듭도 결국은 서서히 풀려 나갔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한 집에서 시부모님, 시동생과 함께 살았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어머니는 시한폭탄이었다, 그렇게 13년.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점점 사그라졌다. 마치 존재 자체가 희미해지는 것만 같았다. 여러 식구가 한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가 숨통이 막혔다. 나는 누구? 정작 ‘나’라는 존재는 뒷전이었다.
왜 내 어깨에 짊어진 짐은 이토록 무거운 걸까?
밤이면 깊은 한숨이 가슴을 짓눌렀다.
잠을 자다가 갑자기 숨이 멎어버리면 어떡하지?
그 불안한 감각이 점점 커졌다.
나는 공황장애라는 것도 모른 채, 들숨을 쉬어낼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가슴이 쿵쿵 뛰고, 목 끝까지 차오르는 심장 소리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이렇게 사는 게 내 삶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참고 견디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어찌 보면 미련한 곰처럼,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겼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버티던 어느 날, 12층 창문에서 밖을 내려다보았다.
젊은 엄마들이 멋지게 차려입고 외출들을 한다.
내 삶은 뭐지? 이상한 충동이 느껴졌다. 뛰어 내리기엔 벽에 너무 높았다. 그런 생각을 한 나 자신에 놀라 창문을 확 닫아 버렸다. 무서웠다. 살아야 했다. 살아야 한다면 이유가 필요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집착했다. 아이들을 돌보며, 그들에게서 살아갈 명분을 찾았다. 감사해야 할 것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감사할 일들을 헤아리다 보니, 어느새 나를 짖누르던 막막함이 조금씩 사라졌다. 그렇게 작은 숨구멍을 찾으며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변화가 찾아왔다.
우리는 분가를 하게 되었다. 꼭 매듭을 단단히 묶어 놓았다고 해서 영원히 풀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꼼꼼하게 묶여 있어 풀 수 없을 것 같던 매듭이 어느 순간 풀려 나갔다.
그 순간부터, 내 삶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공황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지만 조금씩 숨을 크게 들이마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늦둥이 막내가 태어났다.
그 아이는 마치 인생이 나에게 준 새로운 선물 같았다.
나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내 몫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게 될까?
순간순간,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울고 웃고, 때로는 지쳐 쓰러지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인생은 그런 변화를 겪어내며 살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죽음도 그렇다.
우리는 언젠가 그 필연을 맞이해야 한다.
하지만 암에 걸리고 치유하는 동안조차도, 나는 죽음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아둥바둥 살아온 세월 동안, 정작 나 자신을 위해 살아온 시간이 없었다.
늘 남을 위해, 가족을 위해, 해야 할 일들에 떠밀려 살았지만, 이제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리고 지금, 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다.
환갑을 맞아 암이 찾아 왔다. 치유의 시간동안 내 마음을 돌보고 나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
이제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데 집중한다.
이 시간이야말로, 비로소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