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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 가의 길이 되는 발자국

길 위에 발자국

by 은빛지원



오늘의 필사

이양연 시, 「야심작」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럽히지 마라

오늘 내가 디딘 발자국은

언젠가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하얀 눈이 내리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조심조심 걸으며 나만의 발자국을 남기던 그 시절. 장독대가 있는 뒷곁에 나가면 그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가끔은 강아지가 먼저 다녀가 그 순간을 채가기도 했지만, 그 작고 동글동글한 발자국조차 순수함의 상징이자 자유로움의 표현 같아 미소가 번지곤 했다. 그때의 나는 예쁜 발자국을 남기고 싶어서 숨을 멈추고 발뒤꿈치를 살포시 먼저 내딛곤 했다. 그 설렘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어른이 된 지금도 눈이 내리면 가장 먼저 정원으로 나가 새하얀 눈 위에 조심스럽게 발을 디딘다. 그것은 어릴 적 나의 마음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주고, 동시에 나만의 새로운 세계에 조심스럽게 들어서는 일처럼 느껴진다.


오늘 필사에서 만난 시 속 문장처럼, 하얀 눈을 밟는 일은 단순한 걷기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삶 속에서 내가 선택하고 나아가는 ‘의지’의 표현이며, 그 발자국은 언젠가 누군가에게 하나의 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묵직하게 만든다. 나는 문득 나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지금까지 어떤 발자국을 남기며 살아왔을까?

누군가에게 위안이 되었을까, 길잡이가 되었을까?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오랜 시간 꼭꼭 숨겨두고 싶던 지난 기억들을 자주 꺼내보게 된다. 그러나 그 시간들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상처를 들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을 다독이고 치유하는 시간이 되어 준다.


공자께서는 『논어』 술이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그중에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 그 선한 점은 본받고, 그 나쁜 점은 거울삼아 고쳐야 한다.”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간다면, 하나는 나이고, 두 사람은 타인이다. 나는 나 자신의 잘못을 잘 모를 수 있지만, 타인의 장단점은 비교를 통해 더 선명하게 보인다. 그래서 모든 이가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이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문득 묻게 된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누군가와 함께 걷는 길 위에서, 나는 본받고 싶은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나로 인해 무엇인가를 조심하게 되는 사람이었을까. 타인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되는 순간, 삶의 진짜 배움이 시작되는 것 같다.


오늘, 나는 또다시 하얀 눈 위에 조심스럽게 발을 디딘다. 그리고 하나의 발자국을 남긴다.

그 발자국이 누군가에게 작은 위안이자 따뜻한 쉼이 되기를 바란다. 어쩌면 내가 걸어온 그 길이,

누군가의 삶에서 잠시 멈춰 숨 고를 수 있는 따스한 발자국 하나로 남을 수 있기를. 그저 조심스레 남긴 이 발자국이 누군가의 길이 되는 발자국이 아니라, 그 사람만의 길을 응원해 주는 작은 흔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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