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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봄날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by 은빛지원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이 세상을 통찰하는 일, 이 세상을 설명하는 일, 이 세상을 경멸하는 일은 위대한 사상가들의 일이겠지.

그러나 나에게는 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 이 세상을 경멸하지 않는 일,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일,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과 경외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일이 중요할 뿐이야.”



비 오는 봄날, 나는 성북동 둘레길을 걸었다.

길상사에서 시작해 수연산방, 심우장, 최순우 옛집까지. 백석 시인의 숨결, 법정 스님의 고요함, 이태준과 만해 한용운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비에 젖은 돌길 위에 조심스레 나의 발자국을 남겼다.

3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걷는 길은 설렘이자 새로운 얼굴들과의 만남이었다. 모두가 자기 계발을 하고, 글을 쓰며, 자신만의 길 위에서 묵묵히 빛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누구와 대화를 나누어도 마음이 열렸고, 서로를 공감하며 함께 웃는 순간들이 이어졌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정말 달라지는구나.’

예전의 나는 세상을 설명하려 애썼다. 상처받은 이유를 분석하고, 나의 부족함을 탓하고, 사람들의 말에 쉽게 상처 입고, 스스로를 경멸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 모든 시절을 지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일’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세상을 미워하지 않고, 나를 미워하지 않으며, 사소한 순간에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 그것이 지금 내가 걸어가는 길이다. 비 내리는 길상사에서 백석 시인의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성우님의 낭송으로 들을 수 있었다. 촉촉한 비와 어우러진 목소리는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심우장에서는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울려 퍼졌고, 그 울림은 또 다른 고요한 감동으로 남았다.

나는 원래 새로운 만남을 반기는 성격은 아니지만, 글을 쓰고 공부하는 이들과의 교류는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았다.

요즘 나는 조금씩 외향적인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다. 깊은 사유로 세상을 꿰뚫는 사람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오늘도 세상을 사랑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나를 미워하지 않고, 세상을 원망하지 않으며, 작고 사소한 순간에도 고마운 마음을 담아 살아가려 한다.

두 달 후, 또 한 번 길 위에 서게 될 나는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까.

조용히, 그러나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해 본다. 비 오는 봄날, 길 위에서 만난 마음들처럼

그날의 나 역시 또 다른 마음과 만날 수 있기를.

당신은 요즘, 어떤 마음들과 함께 걷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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