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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근찬- 족제비

아이들의 시선으로 본 일제말기 사회상

by 메리골드

하시모또 농장을 무대로 어수룩한 인물이 여럿 등장하는 이 소설. 이 설은 아이들의 시선으로 그려져 있다.


처음으로 휘파람 소리가 후익 두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을 때, 윤길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물랐다. 해방되기 한 해 전의 가을이었다. 국민학교 5학년이었다.

윤길이는 곧 학섭이네 집을 향해 달렸다.

학섭이는 같은 학급으로 이웃에 살기 때문에 남달리 친했다. 나이는 두 살 위였다. 그래 그런지 몰라도 그는 벌써 오래전부터 휘파람을 아주 멋있게 잘 불었다.


학섭이가 가장 신명을 내는 곡은 군대에서 취침 신호로 부는 나팔 소리의 곡조였다. 그때의 군대란 말할 것도 없이 일본 군대였다.


자신의 유년 체험을 근거로 일제말기 사회상을 그린 하근찬의 작품들 대부분이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있다. [족제비]도 어린이의 시선을 통해 하시모또 농장을 중심으로 한 해방 전후 민중적 현실을 그리고 있다.


그로 인해 일제의 간악한 농촌수탈과 식민지 조선의 가혹하고 어두운 현실이 어린이의 순진무구함과 대비되면서 강렬하게 부각되는 효과가 있다. 어린이는 폭력에 약한 순수한 존재. 그런데 그 어린아이의 눈이 무섭다는 것. 가혹한 역사에서 어지럽고 고통스러운 조선의 사회를 보는 매서운 눈을 가진 아이들이라는 것.


식민지 현실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어린이의 시선이 굴절되어 나타난 작품인 이 족제비는 과거 모 초등학교 뒷산에 나타난 족제비 사건이 생각났다.


그해 그 학교 근처 관사엔 토끼와 닭을 기르는 닭장이 있었다. 그런데 그 닭장 울타리를 넘어 밤마다 닭이 한 마리씩 사라졌다.


그 범인이 누구?


생존의 절박한 사회회에서 민중 현실의 여러 국면들이 회화적으로 일그러진 가운데 해학적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이번 작품은 고생원의 우스꽝스러운 모습과 어린이들의 순진 무구한 행동이 어우러져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알고 보니 그 족제비가 바로 농장의 대지주인 흡혈마귀인 하시모토였다. 그런데 그의 외향이 그 족제비를 닮았다는 풍자가 아주 기가 막혔다.


윤길이는 실컷 웃고 나서 학섭이에게,

"너희 아버지 최고다! 최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학섭이는 화를 내지 않았다. 멋쩍은 듯,

"술에 취해서 안 그러나. 아부지도 주책이지, "

하고는 저도 그만 씩 웃었다.

윤길이는 더욱 기분이 나서 냅다 휘파람을 불어대기 시작했다. 새로 쏟아져 나온 노래를 닥치는 대로 마구 불었다. 학섭이도 부르기 시작했다. 이제 윤길이의 휘파람도 학섭이 못지않게 가볍고 부드러웠다.


깡깡깡~~~~~ 종은 여전히 울리고 있었고, 신작로 뽀얀 먼지와 함께 도락꾸는 사라져 가고 있었다.

1970.1 한국소설문학대계


이 글은 비록 매우 짧은 글이지만 읽는 동안 농민의 서러움, 무차별 폭력성, 일제의 쌀 수탈행위. 잔악함, 혹독함, 처참함, 민족의 씨를 말려 버리려는 그 사이에 농민들이 쌀을 지키려는 강한 의지, 불타는 저항감, 어린이들 마저 분개하게 하는 저 족제비 탈을 쓴 잔악한 전쟁의 서슬 퍼런 상흔들이 이 아침에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렇게 한국전쟁은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엄청난 상처를 남긴 동시에 전후 한국사회의 급속한 변동을 초래했다. 무엇보다 민족의 이념적 분열을 심화시켰다. 대립과 갈등을 낳았다. 남한에서는 안보의 논리가 민주와 자유를 강제로 유보시킬 수 있도록 위력을 발휘했다.


이 글 외에서 [수난이대]라는 작품은 부자의 비극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 근현대사의 비극을 그대로 압축한 것들. 태평양전쟁에서 팔을 잃은 아버지가 한국전쟁에서 다리를 잃어 아들을 업고 위태로운 외나무다리를 거너는 장면을 그린 작품.


수난 앞에 단순히 삶을 체념하거나 절망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작품들. 어제 인터넷을 보다 난 전쟁보다 더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 가정 넷이 모두 자동차에 갇혀 숨을 끊었다는 소식, 그리고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가족이 강물로 뛰어들었다는 기사들을 들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행위는 타인의 아픔을 돌보지 않는 것. 나만 바라보고 사는 행위는 곧 모두가 저지르는 죄임을 달게 되었다.


한 권이지만 여러 작가의 손을 거쳐 역사의 증거들을 보면서 과거의 역사가 현재까지 계속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 같이 더불어 사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지금 우리 지구 반대편은 우리가 겪은 지난 아픔과 같은 전쟁을 겪는 저 불쌍한 아이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 땅 위에 다시는 전쟁이 없길 아이들이 휘파람을 불며 사는 날이 다시 돌아오길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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