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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그림 수집가들- 손영옥

조선의 미술에 얽힌 왕과 화가들의 이야기

by 메리골드

안평대군은 세종이 즉위하던 1418년에 태어났다. 문종 4년인 1453년 형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으로 사사되기까지 만 35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다. 호는 비해당, 매죽헌, 만 11세의 나이에 좌부대언 정연의 딸과 결혼했다.


서예로 일가를 이뤘으며 탁월한 학문적 소양과 쟂를 갖춰 당대의 예단을 주도한 대군. 그는 10대부터 서화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무릉도원을 꿈꿨다. 그와 막역한 관계였던 신숙주가 그를 배반하고 수양대군의 편에 섰다고 하니 역사가 비극의 도화선 같다.


안평대군은 중국 서화가의 작품을 동진에서부터 송나라, 당나라,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시기별로 이름만 들으면 귀가 번쩍 뜨일 만한 대가들의 작품을 소장했다. 중국 회화사상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동진의 화가 고개지의 작품을 비롯해 당나라의 오조자, 왕유, 송나라의 곽충서, 이공린, 소돌파, 곽희, 문동, 원나라의 조맹부, 선우추, 유백희, 나치천, 마원 ---.


고개지의 작품


전제 소장품 174점 중 136편이 중국 그림이다. 서울 박물관에 소장된 안평대군의 글씨 '봉지청'은 15세기 작품으로 행서체의 글씨다. '봉'자의 구불구불한 세로획 등이 삶의 여유와 멋을 느끼게 해 준다.


비해당은 서화를 사랑하여 누가 조그마한 쪼가리라도 가지고 있다고 하면 반드시 후한 값으로 샀다. 그중에서 좋은 것은 골라 표구를 해 소장했다. 그가 어느 날 신숙주에게 보여 주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것들은 좋아하는데 이것 역시 병이요. 열심히 찾고 널리 찾기를 10여년 한 수에 이만치 얻었소.'



오늘의 이룸이 내일의 무너짐이 되고 마음과 흩어짐이 또한 어쩔 수없게 되니 이것또한 필연이다.


안평대군은 글씨의 대가같다. 그가 글씨로 득명하는 데에는 컬렉션이 한몫했다고 한다. 서체는 고려말에 들어온 원나라 초기 문인 조맹부의 송설체를 토대로 개발한 것이라고 한다.

'비례당은 왕자로서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에 뛰어났다. 서법은 천하제일이고 그림과 음악도 잘하였다. 만권의 책을 소장했고 문사들을 불러 모아 12경시를 짓고 또 48영을 지었다.


안평대군은 1453년 형 수양대군의 난으로 35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2009년 대한민국은 [몽유도원도 신드롬]에 빠졌다. 일본 텐리대가 소장한 [몽유도원도]가 13년 만에 고국 나들이를 했다. 그러나 기간이 겨우 열흘간. 관란 허용시간은 1분, 무려 후다닥 꿈처럼 흘러간 시간.


합이 모두 20m나 되는 긴 두루마리.


월산대군은 비운의 장남 수장가였다. 월산대군의 시조 한편을 소개한다,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라


월산대군은 물욕과 명리를 초월한 사람. 서화 수집가들의 삶은 그 속에 초탈로 자신을 합리화한 비극적인 왕자의 운명을 보게 된다.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그림 속에 숨다


월산대군 이정은 시대의 불운아. 세조의 맏손자로서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으나 권좌를 동생에게 내준다. 아버지는 세조의 장남이었던 의경세자다. 하지만 의경세자는 임금이 되기 전, 세자로 책봉된지 2년 만에 세상을 등진다.


그를 대신해 작은아버지인 예종이 세조를 이어 임금이 된다. 그 예종도 오른 지 불과 1년 만인 29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의경세자의 맏아들인 월산대군, 차남인 잘산군, 예종위 아들인 제안대군.


세조의 비인 태비 정희왕후는 새 임금을 지정하는 교지에 이렇게 말한다.

원자인 제안대군이 너무 어렸으므로 상직으로 왕관은 월산대군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역사는

반전을 거득하고.


"원자인 제안대군(4세)은 너무 어리고 월산군은 평소에 병이 잦소. 잘산군은 어리나 세조께서 늘 큰 그릇이라고 칭찬했소."


이에 병약한 월산대군은 만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그의 동생인 잘산군인 성종이 왕위에 오른다. 이러한 권력의 배후엔 정희왕후가 당대 최고위 권력자여서 잘산군의 장인인 한명회와 정치적으로 결탁한 결과였다.


서로의 처지를 서화로 달래다


짧은 생애, 이 비운의 왕자가 마음을 의탁했던 곳이 바로 서화의 세계. 정치판이 잔혹하자 조선의 개국 이래 왕권을 놓고 형제끼리 삼촌과 조카가 서로 목을 벤 역사가 돌자 역모에 연루되면 처자식도 무사하지 못했다.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조카 연산이 자신에게는 큰어머니가 되는 월산대군의 처 승평부부인 박씨를 범해 자결케 한 사건이 있다.


월산대군은 새로운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고가여도 구입하고야 마는 열열 장서가였다. 월산대군이 그나마 서화느이 세계에서 작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성종의 비호 덕분이었단다. 성종은 자신에게 왕위를 빼앗긴 형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때문에 자신이 그린 난 그림을 월산대군에게 보여주고 제화시를 쓰도록 부탁했다. 시문뿐 아니라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던 월산대군의 재능을 그가 입증해 준 증거다.


[완물상지]족쇄, 그래도 멈출 수 없는 그림 애호

완물상지는 [서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조선이 신권사호이자 유교사회였기 때문이다. '귀와 눈을 즐겁게 하는 것에 마음이 쏠리면 자신의 뜻을 잃는다'는 의미이다. 왕이 예술에 탐닉해 정사를 소홀히 할까 경계한 용어란다.


성종의 미술 사랑은 대신들의 기중으로 볼 때 선을 넘은 적이 있었단다. 대신들은 이를 보고 끊임없이 간언을 올렷다. 조선왕오실록에는 성종이 그림을 너무 그려 염려스럽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시대 세종도 대와 난을 그렸고 문종도 눈속에 핀 매화를 그렸다.


[빈풍도]


성종은 [빈풍칠월도]를 보면서 백성들이 농사짓고 베 짜고 제사 지내는 일상의 모습을 다은 그림을 보며 군왕의 도리를 새기고 백성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했다. 그가 신하들과 가장 만히 감상하고, 제시르 ㄹ쓰게 한 그림의 종류는 고사인물도였다.


어쨌건 성종은 궁중 여인들의 교화를 절실히 원했다. 성종이 다른 궁중 여인들고 밤을 보내는 일이 잦자 윤씨가 후궁들을 독할할 요량으로 비상을 숨겨둔 것이 발각이 되기고 했단다. 격무에 지친 왕들은 그림을 보며서 지친 심신을 달랬다고 한다.


성종은 또한 예술 후원가로서 주목받는다. 신분질서가 있었던 조선초기. 왕이 중인 신분잉 도화서 화원을 당상관에 앉히려했다. 그러자 미천한 화공 따위에게 웬 당상관이냐며 아주 상소했다. 결국 성종은 두 화원의 당상관 제수를 철회했다.


그가 두 화원을 당상관에 제수하려 했던 슬픈 역사가 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성종은 의경세자가 죽은 후 그 아들 월산대군과 잘산군이 너무 어려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고 자란걸 아타깝게 여겼다. 장남이 아닌 차남으로 왕위에 올라 그는 형 월산대군이 평지풍파에 휘둘리지 않고 지내고 그 세계에서 맘껏 그림을 그리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듯 이 책은 조선 왕들의 미술 사랑과 슬픈 역사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그림에 드러있다. 이외에 연산국도 예술 후원가로서의 면모가 있었다. 서화 애호 문화의 서막을 연 왕이 연산군이라고 한다.


이 글을 읽으면서 그림을 감상하는 재미와 재밌는 역사 이야기를 듣는 이중의 기쁨을 누릴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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