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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02.슈퍼히어로의 귀환

상처 난 가족 안에서 다시 배우는 사랑의 모양

by 봉순이

엄마의 대장암 판정이 있던 날, 나는 병원에서 본 오빠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몰래 울고 온 얼굴이었다.
충혈된 눈, 잔뜩 부은 눈두덩이, 며칠째 잠을 못 잔 사람 같은 표정.

그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는 순간, 나는 직감했다.

우리 가족에게 일생일대의 큰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는 것을.


오빠는 나보다 다섯 살 많다. 어린 시절의 그는 든든했다.

골목에서 누가 나를 괴롭히기라도 하면 어디선가 뛰어나와 나를 지켜주던 사람.

나는 오빠를 ‘슈퍼히어로’라고 믿었고, 세상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그 히어로의 그림자는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사춘기를 지나며 거칠어졌고, 성인이 된 뒤에는 무모함이 그의 인생을 삼켰다.

카드를 돌려막아 만든 빚, 밤마다 울리던 초인종, 문 앞에 서 있던 낯선 채권자들.
벨소리가 울릴 때마다 집 안의 공기는 얼어붙었다.


엄마는 쌈짓돈을 꺼내 오빠의 빚을 막았다.
나는 오빠도 이해되지 않았고, 그런 오빠를 끝까지 감싸는 엄마도 이해되지 않았다.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

그 질문은 오래도록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남아 있었다.


결혼 1년 차였던 어느 날, 아빠는 생활비를 카드로 메우다가 카드론으로, 다시 사채로 이어졌다.
이자에 짓눌린 채 밤을 새우다 결국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개인택시를 팔아 빚을 정리했고 남은 건 재개발 될 연립주택 하나뿐이었다.

엄마를 안전한 곳으로 이사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오빠는 마치 남의 일처럼 멀찍이 서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엄마에게 말했다.


“1/3은 내 유산이야.”


숨이 턱 막혔다. 오빠는 태연한 얼굴로 돈을 요구했다.


“외국에 여자친구가 있어. 내 몫을 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


나는 절대 주지 말라고 했지만 엄마는 보험을 해약하고 금붙이까지 꺼내 오빠에게 건넸다.

그 돈을 모두 받은 오빠는“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라는 말을 남기고 진짜로 외국으로 떠났다.

그 뒤로 연락 한 통 없었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생각했다.

그래, 잘 가라.

너와 나의 인연은 여기까지다.



그 후 나는 엄마를 작은 아파트로 이사시키며 말했다.


“엄마, 이제 오빠는 안 와. 이제 나랑 박서방이랑 우리 셋이서 살자.”


그런데 석 달 후, 오빠는 다시 돌아왔다.

짐 하나 없이, 빈손으로.


엄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문을 열고 오빠를 받아들였다.

그 포용이 그때의 나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할 마음조차 없었다.

'저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야'

그렇게 단정했다.


오빠는 엄마의 작은 집 방 한 칸에서 또아리를 틀며 지냈다.
엄마는 그 좁은 공간에서 오빠의 빨래를 하고, 밥을 차리고, 온 신경을 다 쏟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가 돌아온 지 6개월째 되던 날, 엄마는 대장암 진단을 받았다.


오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내가… 엄마 마음을 너무 힘들게 했어. 약해빠진 놈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 말은 이상하게 잔인했고, 이상하게 진실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오빠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하루에 몇 갑씩 피우던 담배를 끊었고, 병원에서 엄마의 곁을 지켰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취업도 했다.


오빠, 나이 오십.
처음으로 삶에 발을 딛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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