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보다 먼저 나를 구해야 했다는 걸 늦게서야 알았다
아이를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몸도, 마음도, 하루의 감정까지도 모두 ‘시험관 시술’이라는 상자 안에 넣어두고 살았다.
지금 돌아보면, 나는 아이를 기다린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다.
유방암 판정을 받기 전 나는 3년 동안 시험관 시술에 매달렸다.
처음엔 희망이 컸다. 아기 이름을 지어보기도 하고, 아기 옷가게 앞에서 괜히 걸음을 멈춰보기도 하고, 그 작은 상상만으로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실패가 반복되면서 그 웃음은 숫자로 바뀌었다.
난포 개수, 배아 등급, 호르몬 수치, 정자 운동성...
언제부턴가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확률을 계산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병원 진료실은 늘 “이번엔… 제발…”이라는 기도로 시작했다가 “이번에도 실패입니다.”라는 말로 끝났다.
돈도 들었고, 시간도 들었고, 마음은 수없이 바닥을 찍었다.
그러던 어느 날, 끝없이 밟아오던 시험관의 페달을 멈춰야 했다.
유방암 판정이 났기 때문이다.
시험관과 암이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절 나는 내 몸이 보내는 신호를 단 한 번도 제대로 듣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아이가 간절했던 게 아니라 ‘아이를 갖지 못한 여자’라는 낙인이 두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가장 잔인한 말들을 반복했다.
“또 실패했어.”
“다들 되는데 넌 왜 안 돼.”
“이 정도도 못하니…”
돌아보면 나를 가장 괴롭힌 사람은 세상도, 가족도, 누구도 아니었다.
바로 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조금씩 배웠다.
아이가 없다고 해서 내 인생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것.
누구의 엄마가 아니어도 나는 충분히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것.
내 몸을 돌보고, 불안을 덜어내고, 내가 좋아하는 속도로 하루를 사는 일.
그 작은 일들이 쌓이면서 나는 조금씩 내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아이를 기다리며 길을 잃어버린 나를
나는 지금 아주 천천히, 다시 데리러 가는 중이다.
그리고 언젠가 내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서 이런 목소리를 듣게 될 것 같다.
“괜찮아. 너는 너로서 지금 충분히 빛나고 있어.”
몸을 되찾아가는 동안,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가족의 이야기’도 조용히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실타래가 엉켜있는 가족이야기 3부에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