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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05. 보너스 같은 삶을 사는 엄마

다시 살아갈 용기를 배우다

by 봉순이


▲ 엄마가 웃었다. 그림이 엄마의 하루를 다시 채우고 있었다.




오빠를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면, 엄마를 이해하는 데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엄마는 10kg 이상 체중이 빠지고, 스스로 관장을 해야 할 만큼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시다 대장암 판정을 받으셨다. 그런데 정작 환자인 엄마는 보호자인 나와 오빠보다 더 담담하셨다. 대장의 3분의 2를 잘라낸 큰 수술 이후, 다시 간과 폐로 전이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조차 엄마의 표정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덤으로 사는 중이야. 보너스 받은 셈 치고, 재미있게 살다 가야지.”


처음엔 그 담담함이 삶을 내려놓은 체념처럼 보여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곁에서 엄마를 지켜보며 깨달았다. 그것은 단념이 아니라,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용’이었다는 것을.


엄마가 항암으로 힘들어하시거나 잠들지 못하는 날이면, 마음을 살짝 다른 곳에 둘 수 있는 무언가를 드리고 싶었다. 인터넷을 뒤지다가 어르신용 색칠공부 책이 눈에 들어왔다.

선이 굵고 그림도 커서 엄마도 쉽게 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책과 색연필을 챙겨 보내드렸다.


며칠 뒤 엄마를 찾아갔을 때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 색칠 공부 할 만해?”


엄마는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시더니, 책과 달력 뭉치를 한가득 들고 나오셨다.


“이거 봐라. 이거 들고 노인정 가니까 할머니들이 다 나와서 구경하더라고.”


펼쳐 본 달력 뒷면에는 놀라운 세상이 있었다. 책 속의 그림을 달력 종이에 하나하나 그대로 옮겨 그리신 것이다. 또박또박 그어 내린 선, 정성스레 채운 색, 달력을 책 크기에 맞춰 오려낸 섬세함까지.

단순히 시간을 때우는 것이 아니라, 엄마는 진심으로 그림을 즐기고 계셨다.


“엄마, 재능 발견했네!”


나의 감탄에 엄마는 환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딸아... 고맙다.... 나... 지금 참 행복해.”


그동안 엄마에게 ‘고맙다’ 혹은 ‘미안하다’는 말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픈 손가락’이라며 오빠만 챙기는 엄마를 보며 마음속으로 원망도 많이 하고 미워도 했었다. 오빠 때문에 늘 착한 아이처럼 살아야 했고, 엄마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어깨에 짐을 잔뜩 얹고 살았던 나의 버거웠던 과거가 엄마의 “고맙다, 행복하다”는 말 한마디에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암에 걸린 상황을 원망하지 않고 지금 너무 행복하다고 하시는 엄마를 보며, 내가 엄마를 너무 몰랐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엄마는 자주 이렇게 말씀하신다.


“딸아, 너무 아둥바둥 살지 마라. 물 흐르듯이 살아라. 지금 이 순간이 제일 행복한 시간이다.”


엄마를 보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 진정한 치유란 병이 씻은 듯 사라지는 기적이 아니라, 병과 함께라도 다시 살아갈 용기를 찾는 일이라는 것을.


먼 훗날, 중년의 내가 삶의 두려움에 떨거나 모든 게 실패처럼 느껴질 때, 나는 엄마가 그린 그림과 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엄마가 내 곁에 없어도 엄마의 작품들은 남아 나를 일으켜줄 테니까.


보너스 같은 이 삶 속에서, 나는 엄마가 물려준 용기로 조금 더 단단해질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통해,

다시 살아가는 법을 아주 천천히 배워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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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오빠를 이해하고 나니 이상하게도 내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졌다.

가족의 문제는 마음 깊은 곳을 흔들어 몸과 하루까지도 무너뜨리곤 한다.
그 무너짐이 조금씩 멈추자 나는 다시 ‘나의 삶’을 챙길 여유가 생겼다.

그렇게 나는 아주 천천히 흙을 만지고, 몸을 움직이고, 다시 일상을 살아가는 연습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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