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02.엉덩이가 헐어도, 다시 배우기로 했다

엄마의 알파벳과 나의 방통대 입학원서

by 봉순이

"친구야, 내년에 신입생 되어봐 내가 다 설렌다."


오랜만에 만난 중학교 동창이자 소꿉친구가 건넨 말이다. 우리는 충무로의 작은 찻집에서 밀린 이야기를 쏟아냈다. 어릴 적 친구란 참 묘하다. 자주 보지 못해도 묵은 장처럼 묵직하고 든든한 맛이 있다.


살아온 이야기와 앞으로의 막막함을 나누다 문득 나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인생 2막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데, 마음만 앞설 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고. IT 분야에서 20년을 일했지만, 쉰이 된 지금은 글쓰기 모임도 기웃거려 보며 다른 길을 찾고 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고 나의 실력은 아직 바닥이라, 높은 안목을 따라가지 못하는 몸과 마음이 답답하기만 하다는 고백이었다.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듣던 친구가 말했다.


"공부를 다시 시작해 봐. 방통대(방송통신대학교) 어때?"

"방통대... 학교를 다시 가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의 대학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남자들에게 군대 재입대가 악몽이라면, 내게는 졸업시험에서 낙제해 재수강하는 꿈이 식은땀을 부르는 악몽이었다. 전산과 시절, 내게 프로그래밍은 '검은 것은 글자요, 흰 것은 종이'일 뿐이었다. 기본 개념조차 잡지 못한 채 바닥을 기던 학점, 어떻게 졸업했는지도 모를 그 시간은 내게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다시는 전산 근처에도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배운 게 도둑질이라 20년을 그 언저리에서 버텼다. 공부와 담을 쌓고 살았기에 석·박사 학위를 따며 치열하게 공부하는 친구들을 보면 경외감마저 들었다. 그들의 학구열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정작 나는 그 고단한 길을 걸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 내가 다시 대학교에 들어간다니.


결심이 쉽게 서지 않았다. 내가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까? 시험 공부를 해서 학위를 받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왜 다시 공부를 하려는 걸까?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떠다니다가, 그냥 이렇게 혼자 즐기며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기울어가던 순간이었다.


그때 엄마의 병원 진료에 동행하게 됐다. 엄마는 병원 시스템이 너무 어렵다고 하셨다. 키오스크며 예약 확인 절차도 힘들지만, 특히 A, B, C관으로 나뉜 복잡한 건물 구조 앞에서 늘 길을 잃으셨다.


그날은 B관 7층 안과를 가야 하는 날이었다. 나는 엄마와 팔짱을 끼고 B관으로 향했다. 병원 바닥에는 새로 A, B, C관으로 가는 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엄마는 바닥을 한참 내려다보시더니 말씀하셨다.


“저게 B고, 이게 A구나.”


순간 깜짝 놀랐다. 알파벳을 거의 모르시던 엄마가 자연스럽게 A, B를 구분하고 계셨다.


“엄마, 알파벳 알아? 어떻게 B관인 줄 알았어?”


엄마는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공부했지. 알파벳 떼느라고 엉덩이가 다 헐었어.”


그러고는 B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셨다. 알파벳을 알고 나니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세상이 조금 달라 보인다고 하셨다.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아… 그래서 공부를 하는 거구나.”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말했다.

"진정한 발견이란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것이다."

엄마는 알파벳을 배우며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으신 것이다.


바이킹의 역사는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로 나갔을 때 비로소 시작되었다. 해안가에 머물던 사람들이 망망대해로 뛰어들어 고통을 감내했을 때 얻은 결실이다.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한다.


엉덩이가 헐도록 알파벳을 외우는 고통처럼, 나 또한 새로운 경험을 위해 그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


나의 대학 생활이 그토록 힘들었던 건, 어쩌면 배움의 고통을 피해 다니기에만 급급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회피 대신 '경험'을 선택해 보려 한다. 그렇게 방통대 도전을 결심했다. 이 무모해 보이는 도전들이 쌓여 나의 새로운 역사가 될 것임을 믿는다.


친구에게 설레는 마음으로 입학원서를 보냈다고 말해야겠다.

크리스마스이브,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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