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서 아홉 번째 날
집 생각
이른 아침, 딸아이의 "아침이야 일어나"라는 말에 가까스로 눈을 뜬다. 지난밤에 누가 날 때리기라도 한 듯 욱신욱신한 근육통이 온몸 구석구석에서 느껴진다. 어제 하루 종일 워터파크에서 딸아이와 신나게 물놀이를 하며 놀아준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이제 겨우 서른넷이라곤 하지만 딸아이와 물놀이 하루했다고 온몸이 이렇게 아픈 것을 보면, 내 몸도 천천히 하지만 분명히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피로 회복을 핑계 삼아 오늘은 외출을 거부한다. 커피를 내리며 방안에 퍼져가는 향긋한 향이나 즐기고, 오전 내내 강릉집 10층 창문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초당동 풍경이나 종종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브람스*와 슈베르트**의 피아노 곡이 휴식의 따분함을 달래준다. 커피와 클래식을 취미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앉아있다 보니 옆에 앉아 있는 아내가 묻는다.
"집 생각 안 나?"
"좀 그러네?"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몸이 피곤하고 휴식이 필요하니 떠나온 집 생각이 난다. 물론 이곳 강릉집도 부족할 것 없는 휴식처이다. 따뜻한 커피와 음악, 창밖으로 보이는 고즈넉한 풍경, 무엇보다도 우리에겐 충분한 시간이 있다.
그런데도 지금 나와 아내는 우리 집이 그립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나를 환하게 반길 것이 분명한 우리 집의 익숙하고 따뜻한 공기가 그립다.
내 몸이 기억할 아늑하고 푹신한 침대가 그립다.
깊고도 달콤한 낮잠을 자고 일어나 몽롱한 정신으로 아무것도 하기 귀찮을 때, 전화 한번 드리고 가면 반갑게 맞아주시며 맛있는 저녁을 해주실 집 근처 장모님댁이 그립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과일 까먹으며 보는 영화 한 편, 늦은 밤 딸아이 재우고 아내와 함께 시켜 먹는 단골 가게의 피자와 맥주, 수압이 세서 물이 시원하게 나오는 샤워기마저도.
내가 잘 알고, 나를 잘 아는 익숙한 모든 것들이 그립다.
그러고 보면 집이란 것도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가족처럼 자신에게 의미와 실체가 있는 존재이다.
지쳐서 쉬고 싶을 때, 위로와 보살핌이 필요할 때 생각나는 가족처럼
잠시 여행을 멈추고 가야 할 길을 생각해 보는 지금, 우리 집이 생각난다.
그리고 거기서 힘을 얻는다.
역시,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이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
*Brahms : 6 Piano Pieces No.2 in A Major Op.118_Intermezzo
** Schubert : Fantasy for 4 hands in f minor D.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