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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주 Jun 23. 2024

그럴듯한 우중런


주중엔 새벽에 혼자 뛰고 일요일에는 역시 새벽이지만 동호회에 나가 회원들과 함께 뛴다. 오늘의 목표는 16km.

 

비몽사몽 간에 집을 나서는 바람에 달리기용 시계를 차지 않고 나와버렸다. 맙소사. 얼마나 뛰었는지, 현재 페이스가 어떤지 중간중간 확인해줘야 하는데. 러너들에게 달리기용 시계는 아이폰보다 소중하고, 달린 거리가 기록되지 않는 건 돈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속이 쓰린 일이건만.


물기 가득 머금은 구름 아래서, 동료 러너들의 중간 쯤에서, 착착착착 그들의 발소리가 만드는 리듬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마로 이슬비를 맞으며 뛰려니 몽상가가 되어 달리는 듯한 기분이 들어 꽤 근사했다. 하지만 폼나는 기분도 잠시. 나는 페이스가 빠르지 않은 편이고, 단련된 러너들 사이에서 달리는 것이 조금씩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속도를 늦춰 후미로 빠지자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16km? 가능할까?" 한 번 든 생각은 뜀걸음마다 튀어나왔다. 급수대까지 뛰고 돌아오면 딱 10km. 10km만 뛰어야 하는 이유들이 하나씩 이어졌다. 나 엊그제 숙직했잖아. 잠 한 숨도 못잤잖아? 다음 날도 안 쉬었잖아. 그래서 오늘 일어나는 게 힘들었어. 그렇지? 날씨는 또 어떻고. 습해. 너무 습해. 비도 점점 굵어지고 있어. 운동화도 젖어가고 있다고.  


급수대에서 목을 축이고 돌아서려는데 "우주씨, 같이 가자! 나도 조금만 더 뛸 거야. 3km만 더 뛰고 돌아오자. 그럼 딱 16km야." 아, 선배님. 왜 하필 16인 건가요. 어떻게 아셨어요. 제 마음 속의 숫자를.

힘을 내 이어 달렸다. 하지만 한 번 잡생각이 든 몸과 마음은 이미 나약해져 있었고 사람이 어려운 나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면서 뛰는 것이 편치 않았다. 결국 포기 선언을 하고 뒤돌아 달렸다.


무리에서 빠져 혼자가 되니 속도가 확연히 느려졌다. 어려워도 사람들과 같이 달렸어야 했나? 조금 더 참고 힘을 짜내 무리에 남았어야 했을까?못 견디고 혼자 뒤돌아섰다는 패배감이 슬며시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걷는 건지 뛰는 건지 애매하게 달리는데 쏴아, 빗줄기가 굵어졌다. 우중런? 러너들을 그렇게 황홀하게 만든다는 우중런?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뛰고 있어 내가! 정말 멋진 러너 아냐?


빗방울 머금은 금계국과 개망초와 잡초들이 예뻤다. 달팽이까지 만났다. 그래. 방향이 다르면 어때. 페이스 모르면 어때. 느리면 좀 어떻고. 이 속도가 나는 편하고, 꽃도 보고, 친구도 만났어.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 사이에서 급급하게 달리는 것보다 훨씬 괜찮지 않아?


이상, 회사 그만 두고 남들 말리는 일 하며 살고 싶지만 용기는 없는 내가 스스로를 우쭈쭈 하며 달렸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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