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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주 Aug 16. 2024

소녀, 살아지다

몇 년 전 김숨 작가의 『한 명』을 읽었다. 작가가 2년여 간 300여 개의 증언을 확인하고 집필한 소설이다. 언젠가는 맞았어야 할 칼날을 정확히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꿰뚫린 것 같았다. 그럼에도 무엇도 하지 않았다. 때로 신문에 실린 조각 기사들을 가만히 읽어보았을뿐 거리로 나가지도, 목소리를 내지도, 더 많은 책을 읽어보지도 않았다. 20만 명 넘게 끌려가 목숨 붙여 돌아온 이가 2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들이 그곳에서 어떻게 쓰였는지를, 돌아온 이곳에서 어떻게 연명하였는지를 열심히 알리지 않았다. 소녀상을 찾아가지 않았다.


오세란 선생님에게서 소식이 왔다. 무대에 서게 될 때 연락 주십사 부탁했던 것을 잊지 않으셨던 모양이었다. 공연일은 8월 14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었다.

  기림무가 시작되었다. 희끗한 머리칼의 그녀가 흰 옷을 입고 등장했다. 작은 꽃화분을 받쳐든 두 손, 땅을 딛는 모든 걸음. 소중한 마음이 담겨있었다.


그녀는 꽃을 위해 볕과 바람을 모으는 소녀였으나 무릎 꿇린 여자가 되었다. 아파했고 고통스러워했다. 그녀의 몸짓을 쫓아가는 내 마음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무대는 그녀의 퇴장 후 위안부 할머니를 이야기하는 연극으로 이어졌고, 극이 끝나자 그녀가 삼베를 걸치고 흰 고깔모를 쓴 채 다시 무대 위에 섰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을 푸는 해원무였다. 왕생길을 뜻하는 긴 백포(白布)가 관객들의 손에 들려 길게 펼쳐졌다. 그 끝에 소녀상이 있었다. 


백포를 가르며 소녀에게 다가가는 그녀의 몸짓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한 걸음씩을 따라 몸을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용기 없던 내가 그녀의 안내로 이제, 소녀 앞에 섰다. 



"때때로 네게 들려오는 모든 말들이 미움에 가득 찬 말들이겠지만, 세상에는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이 있어"

- 찰리 맥커시,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미안해요. 잊지 않을게요. 기록할게요, 이야기할게요. 당신들의 시절, 그 소녀들이 살아있을 수 있게 나 용기낼게요. 나의 몸짓으로 사랑할게요. 한(恨) 없이 무한히 자유롭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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