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묘한 메모의 묘미』, 김중혁
메모나 낙서, 좋아하시나요?
저는 체계적으로 메모를 기록하는 편도 아니고 습관이나 유희로 낙서를 즐기는 편도 아닙니다만 신문을 읽을 땐 꼭 색연필이나 펜 한 자루를 손에 들고 시작합니다. 새로 알게 된 사실이나 기억해 두었다 인용하고 싶은 문장에 밑줄을 긋고 몇 자 적어보기도 하거든요. 그렇게 하면 눈으로만 읽어내려갈 때보다 머릿속에 각인이 잘 되는 것 같아 만족스럽습니다.
하지만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날따라 유독 마음에 드는 색깔의 색연필을 고르는 순간은 대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나 싶은 인생, 그럼에도 내가 주체적인 존재임을 잊지 않게 해주는 의식이고 부드럽고 빳빳한 흰 A4 용지가 아니라 조금 거칠고 얇은 잿빛 신문에 밑줄을 긋고 동그라미를 치고 내 글씨를 적어넣는 그 촉감이 꽤 매혹적이기에 오늘도 멋진 구절이 나타났을 때 옳거니! 메모이자 낙서를 남겼습니다.
소설가 김중혁의 에세이, 『미묘한 메모의 묘미』를 골라든 건 제목의 묘미가 뛰어나서였지만 메모를 잘 하면 혹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대는 바람일 뿐, 그동안 작가의 행보를 보아온 바, 이 책은 그런 내용은 아닐 거야, 하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네, 그런 책은 아니었습니다. 메모를 잘 하면 일 잘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멋진 소설을 써낼 수 있다, 똑똑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같은 내용은 한 줄도 없었습니다.
메모에 관한 작가의 경험과 단상, 작가가 실제 써 본 메모의 도구와 방법 들이 소개된 이 책을 읽으며 예상치 못한 위안을 얻었습니다. 저는 타고난 것인지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완벽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계획서나 보고서를 쓸 때면 핵심을 콕 짚고, 보고 받을 사람이 궁금해 할 것을 강조하면서도, 내용은 간결해야 하고, 가독성 또한 좋아야 하며, 미관상 깔끔하고 통일감도 갖추어야 만족스럽습니다.('좋아한다'는 것이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스트레스를 받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 집중하다보면 에너지 소모가 커 빨리 소진되고 맙니다.
또, 한 번 시작한 것은 웬만하면 지속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 점을 부러워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게 또 나름의 단점이 있습니다. 아침 걷기를 시작했으면 더 자고 싶은 날에도 일어나 걷고, 영어공부를 시작했으면 중요한 일들이 줄을 서 바쁜 날에도 찝찝해 생략하지 못하고, 저녁 달리기를 시작했으면 영하의 겨울이 되어도 달려야 하다보니 네, 역시 또 에너지를 쑥쑥 내어쓰고 텅 비어버리곤 합니다.
"글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지만, 메모는 완성에 관심이 없다. 글은 쓰면 쓸수록 허점이 크게 보이지만, 메모는 미진한 채로 보아도 좋다." - 『미묘한 메모의 묘미』, 195면
맥락 없는 끄적임, 되는 대로 슥슥 그은 스케치, 다시 보았을 땐 정체를 알 수 없는 숫자들,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기록들. 김중혁 작가는 그런 메모가 일관적이지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은 우리와 닮았다고 말합니다. 그의 말이 맞다면 우리 또한 완성되지 않은 채 있어도 좋다는 결론.
오늘도 열심히 완벽을 좋아했지만 아무래도 지금 저에겐 완벽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다는 오케이 사인이 필요했나 봅니다. 가쁘게 내쉬던 숨을 고르고 한 숨 크게 들이마시게 하네요, 이 미묘한 메모의 묘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