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대회 D-31
눈을 뜨자마자 창문을 열었다. 후두두둑 후두두둑.
빗소리, 비냄새, 비가 만드는 멜랑콜리, 창에 그어지는 비의 사선, 자동차 천장을 두드리는 요란한 비, 왁왁하는 와이퍼 소리까지. 비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부러 비를 맞으며 걷고, 굵은 비에 흠뻑 젖은 채 자전거를 타고, 쏟아지는 빗속에서 소리 지르며 뛰어놀았던 날들이 여전히 소중하다. 그렇게 비를 좋아했는데.
달리기를 시작하고 나서는 하늘이 심상치 않은 날이면 혹 비가 오면 어쩌나 마음 졸인다. 제발 내리지 마, 한 시간만 있다 내리면 안 되겠니? 나 얼른 뛰고 올게, 응?
오늘 하늘은 얄짤 없어 보인다. 체육관으로 가자.
오랜만에 트레드밀에서 달렸다. 스피드 6.6 설정. '별일 없이 달리기'님의 충고대로 속도를 늦춰 달렸다. 페이스를 보니 7'40". 밖에서 달릴 때보다 50초에서 30초가량 느린 속도다. 좋아, 이 페이스를 유지하고 끝까지 달리면 후반부에 컨디션이 어찌 되는지 한 번 달려보자고.
일단 호흡도 롤링도 안정적이었다. 평소 땅에 바짝 붙어서만 깔짝거리지 도통 시원하게 원을 그리지 못하는 발도 엉덩이 쪽으로 조금 더 올라왔다. 숨이 차오르지도 않았고 더 이상은 못 뛰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7km까지 무난하게 뛰었고 시간만 더 있었으면 8km, 9km 역시 큰 무리 없이 뛸 것 같았다. 다만 시선을 코앞인 트레드밀 전광판이나 TV에 두어야 해서 눈이 피곤했고 좀 지겹기는 했다. 밖에서 뛸 때와 같은 시간을 들였지만 짧은 거리를 뛰어 성에 차지 않았다.
어제 밖에서 달릴 때는 첫발을 떼고 롤링의 리듬을 찾는 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작은 각도의 오르막이 나오면 허벅지에 힘이 더 들어갔다. 하지만 몸이 풀리면서 페이스가 5'36"까지 빠르게 올라가 신이났다. 코너를 돌 때도 최대한 속도를 줄이지 않고 방향을 틀기 위해 요령을 부리는 재미가 있었다. 6km를 넘기면서부터는 헉헉거리며 페이스가 7'40"까지 떨어졌지만 상쾌했고 오만 것들을 보았고 여러 생각이 들고났고 달리는 맛이 있었다.
적당한 속도로 꾸준히, 묵묵히, 변함없이 해내는 사람 v.s 미친 듯 내달리고 헐떡거리며 하고 싶은 걸 해보는 사람. 뭐가 나은 걸까?
대상에 따라 다를 수도 있고, 나이에 따라 달라져야만 할 수도 있겠지. 30대 중반까지는 일은 내달렸고 나 자신에게는 묵묵했었다. 기력 좋게 활동할 수 있는 나이를 70대까지로 봤을 때 30대 중반이면 절반인 셈인데 마침맞게도 딱 그때 마음사라짐병을 겪으면서 모드를 바꿨다. 일은 적당한 속도로, 하고 싶은 것에는 그때그때 몰두하고 싶은 만큼으로.
내일은 어떻게 뛰어볼까? 일단 비나 안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