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대회 D-35
드디어 오늘이 왔다!
목표 9km. 최장거리를 또 한 번 갱신하기 위해, 그렇게 다음 달 있을 마라톤 대회에 1km 더 가까워지기 위해 며칠 전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고 어제는 달리는 것도 쉬었다.
9km를 향한 기대와 걱정을 안고 동호회 모임에 나갔다. 마음이 사라지는 병을 얻고 나서는 두세 명이 만나는 자리도 피해왔는데 지난주 모임에 처음 나가 이십여 명에게 둘러싸여 "안녕하세요. ㅇㅇ동에서 온 ㅇㅇ년생 이우주입니다." 인사를 하는 환장하겠는 상황에 놓인 기억에 잠시 주춤했지만 설마 두 번째 온 인사를 하라고 하진 않겠지. 다른 일 같았으면 절대 사람들 있는 곳에 나가지 않았을 테지만 지난주에 여럿이 달려보니 평소보다 페이스가 살짝 빨라져 혼자 뛸 때는 좀처럼 되지 않았던 속도훈련이 되어 좋았다. 동지들의 힘으로 최장거리 갱신에 도전해 보자!
제시간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없었다. 뭐지? 여기가 아닌가? 벌써 뛰기 시작한 건가? 단톡방에 장소를 묻는 질문을 남겼지만 정말 달리고 있어서 그런지 아무도 답을 달지 않았다. 아까운 시간은 점점 흐르고 혼자 잘못된 곳에 서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거봐. 그냥 혼자 뛸걸.' 살짝 빈정이 상할 때쯤 한 명(A라고 하자)이 나타났다. 6시 모임에 나온 건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명색의 사회불안증 환자가 그래서 쓰나. 눈치나 살피며 기다려보자.
진작에 다 푼 몸을 이제야 풀기 시작한 척하고 있을 때 한눈에 봐도 뜀력(?) 오래돼 보이는 또 다른 한 명이 나타났다. A가 바로 물었다. "오늘 6시 여기 맞아요? 왜 아무도 안 와요?" 뜀력남, 형광 주황색의 휘황찬란한 러닝화로 갈아 신으며 답하길 "오늘은 대회 준비라 자유롭게 와서 각자 페이스대로 뛸 거예요."
크게 아쉬울 것 없던 나는 뜀력남의 말을 듣고 달리기 시작했다. 코스를 대충 알고 있었고 꼭 그 코스가 아니면 어때. 길이면 다 뛸 수 있는 거지. 고!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A인 것 같았다. 돌아볼 수는 없었다. 그 정도 사회성 있었으면 처음 봤을 때 동호회냐고 물었겠지.
어제 안 뛰어서 그런지 이상하게 호흡의 리듬이 잡히지 않았다. 평소 코로 두 번 들이마시고 두 번 내뱉으며 달리는데 그게 발 구르는 속도와 맞지 않아 삐그덕거렸다. 왜 이러지? 달리기 시계(거봐. 시계 샀어야 했다니까!)를 보니 페이스가 6'10". 평소보다 30초나 빨랐다. 숨을 빨리 쉬든 속도를 늦추든 리듬을 찾아야 했다.
'페이스를 찾아야 해, 찾아보자, 집중, 집중... 뒤에 저 발소리, 얼마나 가까이 있는 거야, 더 빨리 가고 싶은데 나한테 맞추느라 속도 못 내는 거 아냐?'
내 리듬을 최대한 빨리 찾아야 하는데 A의 발소리에 신경을 쓰느라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나보다 잘 뛰는 여러 명 속에 묻혀 뛸 때는 나에게만 집중해 달려도 되니 마음 편했는데 단 둘이, 그것도 내가 선두에서 뛰니까 마음이 말도 못 하게 불편했다. 내 달리기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A의 달리기가 어떤지를 자꾸만 살피고 있으니 기다려왔던 오늘이 망쳐지는 것 같아 점점 마음이 상했다. 제발 추월해 가요. 먼저 가요 제발. 나를 두고 가란 말이에요!
보통 5km까지는 편안하게 뛰었는데 오늘은 4km부터 빠르게 지쳤다. 아무래도 페이스가 나에게 너무 빨랐다. 9km를 뛰려면 속도를 늦추고 체력을 분배해야 한다는 걸 안다. 아는데, 내 뒤에 A가 있단 말이다. A님, 저 지금 너무 힘들다고요. 그냥 지나쳐 가시면 안 돼요? 왜 이렇게 일정하게 따라오시냐고요.
그렇게 쫓기는 기분으로 '그만 뛰어, 말아'를 수십 번 망설이며 8km를 뛰었을 때, A의 발소리가 갑자기 거칠어지면서 바짝 쫓아오더니 이내 "으헉"하고 멈춰버렸다.
드디어 혼자가 되었다. 체력이 바닥나 땅을 질질 끌던 발이 사뿐사뿐 롤링을 시작했고 1km쯤 너끈히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 혼자라 너무 좋아. 뒤에 아무도 없어. 날아갈 것 같아! 10km까지 내쳐 달려버려? 하지만 겨우 요만큼 더 갔을 때 다시 한계에 다다랐고 9km를 다 뛰었을 때 나도 "으헉" 멈춰버렸고, 사회불안증 따위 단번에 완치되어 동호회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직행해 "저도 물 좀" 하는 신공을 펼쳤다.
"저기요" A가 다가와 말을 붙였다. "대체 여기 한 바퀴가 몇 km에요?" 답을 하려고 뒤를 돌아보니 A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시뻘게진 얼굴, 풀려버린 동공, 헝클어진 머리, 온통 땀에 젖은 티셔츠. 자기가 얼마나 뛴 줄도 모르는 거야, 설마? "3km 조금 안 돼요" "3km요?" "네, 8km쯤 뛰신 거예요." "8km요?" 잠시 말을 잊은 A. "제가 길을 몰라서 놓칠까봐 쫓아가느라 힘들었어요. 아무튼 덕분에 잘 뛰었네요."
9km, 1시간 01분, 페이스 6'48"
오늘 기록이다. 내 생애 최고 빠른 페이스. A님, 덕분에 제가 잘 뛰었네요. 사람들이랑 같이 물 마실 만큼의 사회성도 길러졌고요. 고마웠습니다. 다음 주에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