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8) 콧구멍 랜턴

by 이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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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대회 D-38


여름 끝 새벽, 달리기 좋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 한껏 상쾌해진 세상이 '안녕!' 반겨준다. 환대로 시작하는 하루.

오늘도 기쁜 마음으로 캄캄한 새벽을 달리기 시작했다.


가로등 켜진 산책길을 달렸다. 한창 달리고 있는데 글쎄! 갑자기 왼쪽 콧구멍으로 나방이 들어왔다! 켁, 킁! 아우, 깜짝이야. 날파리도 아니고 웬 나방이... 뭐, 달리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내가 워낙 빨라야 말이지. 여기서 중요한 건? 그 와중에도 페이스를 잃지 않고 계속 달렸다는 것. 이 프로 정신, 나방에게 날개박수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글쎄! 잠시 뒤에 다른 나방이 왼쪽 콧구멍에 또 들어왔다! 단기간 유경험자로서 능숙하게 킁, 빼내고 달렸지만 의아했다. 내 왼쪽 콧구멍에 무슨 일이 있나? 나방을 불러모으는... 혹시, 불빛이 나오는 거 아니야? 달리기로 자가발전하는 콧구멍 랜턴? 와, 굉장한데? 그럼 그때 한라산도 쉽게 올라갈 수 있었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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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일이 너무 재미없는 정, 밤잠 못 자서 못 살겠는 우, 살 좀 빼볼까 싶은 은과 상, 동네 뒷산 좀 타 본 선이 모여 한 달에 한 번씩 산에 갔다.

산은커녕 계단도 안 걷던 체력으로 오르막내리막이라니. 벌게진 (진짜 못생긴) 얼굴로 헥헥거리느라 무슨 정신으로 산을 탔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늘도 차마 그 꼴을 못 보겠었는지 고작 한 달에 한 번이었는데도 몸이 산에 익숙해져 이 산 저 산 다닐수록 즐거웠고 같이 산을 오르는 친구들 (사실 우리 모임의 이름은... '첩첩산중'이다...)과도 각별한 정을 나눴다. 너무 각별해서 함께할 때면 혼자일 때보다 훨씬 용감해졌는데, 그래서 '한라산에 가보자!' 했고 그로부터 얼마 후 깜깜한 새벽, 핸드폰으로 발밑을 비춰가며 정말 한라산에 올랐다.


그때 나는 번아웃과 팽팽한 기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산에 가는 날이면 나의 압승이었다. 몸을 혹사하는 괴로움과 정상에 올랐을 때 뻥 뚫리는 새가슴의 카타르시스로 다시 당분간을 살아낼 수 있었다.



"산은 다른 산을 기대하게 했다. 모퉁이를 돌면, 정상에 서면, 다른 산이 보였다. '저 산은 어디일까? 저 산의 이름은 뭘까? 저 산에 가고 싶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산들을 보면 가슴이 벅찼다.' - <아무튼, 산> 30쪽, 정보영


오늘은 8km를 달렸다. 뛰고 난 뒤 숨을 몰아쉬며 내일의 달리기를 기다린다.

2023년의 여름 끝, 나는 파노라마의 어디쯤을 달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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